미국 보스턴
미국 보스턴에 폭설이 왔던 2019년 3월 초, 나는 강추위를 뚫고 고속버스에 올랐다.
코네티컷 대학 친구들은 이 날씨에 무슨 여행이냐며 나를 말렸지만, 미국에 사는 이 기회 동안 최대한 많은 곳을 가보고자 했기에 외투를 톡톡히 입고 배낭 하나를 걸친 채 떠났다.
보스턴은 미국 역사의 중심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독립혁명의 발상지이자,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정치,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교환학생을 지내면서 그 문화에 관심이 생긴 나는 미국의 뿌리정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던 것 같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와 같은 문화와 인종의 용광로가 된 곳이 아니라, 400여 년 전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든 태초의 도시에 가보고 싶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리는 이를 꽉 깨물고 도착한 보스턴은 눈이 무릎만큼 쌓여있었다. 관광객은커녕 로컬들조차 이런 날씨에 이불 밖은 위험하다 생각했는지, 도시가 한산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뉴잉글랜드는 미국의 북동부 끝에 위치한 6개의 주(States)를 통틀어 부르는 지리적, 역사적 명칭인데, 보스턴이 포함된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 MA)와 내가 교환학생을 했던 코네티컷주(Connecticut, CT)도 여기 포함된다.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이라 하면 클램차우더와 랍스터를 꼽을 수 있다.
클램차우더는 대합(Clam)과 야채를 넣어 끓인 수프이지만, 특히 뉴잉글랜드 스타일은 그 특유의 질감으로 유명하다. 크림 베이스 수프에 버터, 우유를 넣어 걸쭉하고 부드러운 질감을 가지고 있다. 보통 크래커나 빵과 함께 먹는데, 특히 빵 속을 파내어 수프를 담는 브레드 보울(Bread Bowl) 스타일이 인기다.
촌구석 기숙사에 살면서 먹어보지 못했던 클램 차우더 브레드 보울을 드디어 먹어보았다. 짭조름을 넘어 빵이 없으면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짰지만 빵을 찢어먹으니 계속 당기는 맛이었다. 코스트코에서 팔던 조개수프와 비슷한 맛이다. 무엇보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날씨에 따뜻한 수프를 먹으니 얼었던 입술과 콧잔등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뉴잉글랜드 지역 해안가에서 잡히는 랍스터는 신선하고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데, 그 랍스터를 랍스터 롤 (Lobster Roll)로 만들어 먹는 것이 시그니처 요리다. 나도 여기까지 온 김에 큰 마음먹고 2만 5천 원짜리 랍스터 롤을 사 먹어보았다. 손 떨리는 가격에 결제를 한 순간부터 후회가 밀려왔지만, 당연히 맛있었다. 버터향 가득한 빵 안에 탱탱한 랍스터가 들어있으니,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다.
순식간에 몇 입으로 끝나버린 랍스터 롤.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 먹은 뒤 파뉼 홀 마켓플레이스에 랍스터 기념품들을 구경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평소 역사책을 즐겨 읽지도 않는 내가 보스턴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바로 프리덤 트레일 걷기였다.
프리덤 트레일은 미국 독립 혁명의 역사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도보 코스로서, 보스턴 도심을 가로지르는 약 4km를 걷는 코스다. 땅에 박힌 붉은 벽돌 선을 따라 걸으면 된다. 전체 코스를 여유 있게 걸으면서 주요 명소를 둘러보는 데 최소 반나절(3~4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평소 미국 팝 컬처에 많이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공감할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 어린 시절 조기유학은 호주와 캐나다에서 보냈음에도 미국에 이상한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 미국 레트로 다이너를 보면 나와는 무관한 옛날옛적이 떠오르고, 미국인을 만나면 그의 억양으로 출신 주와 성향을 추측한다. 그 내적 친밀감 덕분에 원래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내가 보스턴 도시 대장정을 떠날 수 있었나보다.
올드 사우스 집회소에서 벌어진 '보스턴 티 파티(Boston Tea Party)' 사건이 불과 250년 전이라니, 반만년 역사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아주 새로웠다.
쌓인 눈도 얼어붙는 날씨에 바닥에 새겨진 붉은 벽돌을 보고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역사 이야기는 걷다 보니 점점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그냥 보스턴을 한 바퀴 돈다는 생각으로 다니다 보니 어느새 USS 컨스티튜션을 지나 벙커 힐 모뉴먼트(Bunker Hill Monument)까지 와 있었다.
역사적 장소도 좋고 의미 있는 도보 코스도 좋지만, 걸으면서 나에게 가장 와닿았던 보스턴의 감성은 바로 고딕 건물과 모던한 건물들의 조화였다. 유럽, 그리고 뉴욕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훨씬 더 차분하지만 그럼에도 각 건물들의 특색 있었다. 세련됐다, 는 표현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어쩔 땐 살얼음이 낀 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어쩔 땐 눈이 소복한 곳을 푹푹 밟아 발목을 적셔가며 보스턴을 누볐다. 이 추위를 견뎌야만 보스턴이 날 인정해 줄 것만 같았다. 눈바람을 헤치고 돌아다녀야 보스턴을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기로 가득한 여행은 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열악한 상황 속에도 뜻한 바를 모두 이루어서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고, 여행 후 감기몸살에 걸리는 과유불급의 결말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 여행 입문자였다. 보스턴 공공 도서관에서 몸을 녹일 때도, 눈 덮인 앙상한 가지나무들만 보이는 롱 워프 부두에서 깜깜한 밤 속에 혼자 걸을 때에도 그 순간을 즐기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내 머릿속은 이미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이건 블로그에 이렇게 써야지, 여기도 다녀와봤다고 친구들에게 말해야지 등등.
여행이 수단이 되는 순간이었다. 얼어붙을 것 같은 두 발을 재촉해 애써 숙소에 도착한 뒤,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녹이면서 생각했다.
"여행하면서까지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 말자"
어릴 적 캐나다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 여행을 와서 하버드 대학교에 들렸던 적이 있다. 부모님은 어린 내가 또박또박 영어를 하는 것이 기특하고 신기하셨는지, 대학교 곳곳을 나에게 영어로 설명해 달라고 하셨었다. 여느 관광객처럼 존 하버드 동상의 발을 쓰다듬는 아이를 보며, 훗날 무언가 큰 인물이 되어있을 딸을 상상하시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던 것 같다.
웃긴 건 하버드 대학교의 존 하버드 동상은 진짜 존 하버드가 아니라고 한다. 존 하버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다른 사람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그래도 사람들은 동상의 발이 닳도록 문지르고 간다. "저도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라며.
10년 뒤 나는 혼자서 다시 존 하버드 동상 아래에 섰다. 과연 나는 부모님께서 소원하셨던 그런 딸이 되었는가. 혹은 되고 있는가. 될 수 있는가.
당시 나는 아직 취업 준비라고는 고작 대외활동 정도 해봤던 대학교 3학년이었다. 6년 뒤, 6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지금보다는 좀 더 세상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나 싶다.
보스턴에서 코네티컷으로 돌아가는 날,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정시에 고속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버스를 놓치고 만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버스는 아직 시동도 걸지 않은 채 정류장에 있었다. 문 너머로 티켓을 보여주며 버스 기사에게 태워달라고 어필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나를 두고 떠나는 버스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한국 같았으면 "다음부턴 일찍 좀 다니세요, 못 타실 뻔했네"라고 좀 핀잔은 듣겠지만 당연히 태워줬을 것이다. 심지어 실을 캐리어도 없이 내 몸뚱이와 백팩뿐이었기에. 이런 매정한 일을 당하면 어김없이 향수병이 찾아온다.
버스 회사에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그게 보스턴 발 마지막 버스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미안하다"가 전부였다.
어쩔 수 없이 새로 버스티켓을 구매했더니, 그 버스는 무려 40분 늦게 도착했다.
여러모로 미국의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다고 마무리 지어본다.
Boston, The United States_ Key words
- Freedom Trail
- Boston Tea Party Ships & Museum
- Faneuil Hall Marketplace, Quincy Market
- Old North Church
- Boston Common & Public Garden
- Harvard University
- Museum of Sc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