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마추픽추
마추픽추 영접에 앞서, 성스러운 계곡(Valle Sagrado) 투어가 시작되었다.
성스러운 계곡 투어는 친체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마추픽추행 기차역이 있는 올란타이탐보 마을에서 끝나는 꽉 찬 일일투어다.
여정의 시작인 친체로는 전통 직물 기술로 유명한 마을이다. 원주민들이 천연 재료로 실을 염색하고 천을 짜는 시연을 볼 수 있다. 이미 관광객들이 많이 다녀가서 그런지 로컬들의 보여주기식 퍼포먼스가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전통 직물 기념품도 팔았는데, 쿠스코(Cusco)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비쌌다. 마치 패키지여행을 떠났을 때 반드시 들려야 하는 제휴 상점에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친체로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라마였다.
알파카와는 또 다른 멍청한(?) 귀여움을 가진 이 동물은 잉카 제국 시절부터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셔틀 역할을 했다고 한다. 퀄리티 높은 털을 위해 기르는 온순한 알파카와는 달리 라마는 자존심이 세고 용감해서, 화가 나면 침을 뱉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내가 평소에 마주치는 사람들과 다르게 생겨서인지 신기한 듯 자꾸 얼굴을 들이댔다. 혹여 얼굴에 침을 뱉을까 봐 조금 겁나면서도 그 또한 꽤나 짜릿한(?) 여행 경험이 될 것 같아서 그대로 두었다.
다음은 거대한 계단식 논과 잉카 제국 요새를 볼 수 있는 피삭에 도착했다.
한국과는 너무 다른 탁 트인 시야와 높디높은 하늘이 너무나 이국적이었다. 이렇게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는 그런 각박하고 바쁜 세상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하고 싶을까?
투어사에서 빌린 알록달록한 판초(Poncho)를 입고 계단식 논에 걸터앉으니 나 또한 한국인으로서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스페인어라고는 "너무 비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학생이에요" 밖에 할 줄 모르지만 로컬들과 좀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도 들었다.
투어를 함께 하고 있던 동행이 상인들에게서 커다란 옥수수를 사 왔다. 옥수수알이 커다란 나머지 내 엄지손톱보다 컸다. 마시는 공기부터 보이는 풍경, 먹는 음식까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순간, 오직 여행만이 줄 수 있는 행복이다.
세 번째 목적지인 마라스 염전으로 향하는 길, 그 '성스러운 계곡'이라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광활한 자연의 모습이었다. 산들이 워낙에 높아서 감히 사진 몇 장으로는 담을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들은 보통 해발 4000m에서 5000m가 넘는 고산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산 봉우리 풍경에 익숙한 한국인인 나에게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미라스 염전은 산비탈에 수천 개의 하얀 소금 연못이 펼쳐진 계단식 소금 공장이었다. 규모가 엄청났다. 잉카 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한다고 한다. 대체 어느 만큼의 소금이 생산되는 걸까, 언덕 아래로 작은 소금 연못들이 수없이 늘어져있다.
너무 궁금해서 웅덩이의 소금물을 살짝 입에 넣어보았는데, 엄청나게 짰다. (당연히..) 염전이라서 그런지 햇빛이 유난히 따가웠다. 투어 시작 전 페루 와카치나에서 이마를 가릴 수 있는 두건을 사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니면 이마가 고구마처럼 구워질 뻔했다.
다음은 잉카 시대의 '농업 실험실'로 불렸던 거대한 원형 계단식 밭, 모라이에 도착했다.
스케일이 커서 신기하긴 했지만 사실 모라이 유적지보다 그 옆에 펼쳐진 거대 산들과 굽이굽이 나있는 흙길이 더 신기했다. 산 사이에는 마치 CG와 같은 작은 마을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가는구나. 여행을 다니지 않았으면 서울, 혹은 한국에만 갇혀있었을 내 세상에 대한 가치관에 순간 아찔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광활한데.
성스러운 계곡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는 올란따이땀보였다.
그냥 보기엔 페루의 작은 외딴 동네 같은데, 마을의 도로와 수로 등이 잉카 시대 설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주민들도 수백 년 전 잉카인들이 쌓은 돌벽 위에 지어진 집에서 여전히 생활하고 있다고.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쭉 이어지는 계단식 건축물은 과거 스페인 침략 당시 잉카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던 몇 안 되는 역사적 장소다.
현실 속 올란따이땀보는 성계 투어를 마치고 지친 관광객들과 관광버스로 북적북적한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휴식을 최고 있는 라마들도 관광객들에게 지쳤는지 무거운 눈꺼풀을 꿈벅거리고 있었다. 온갖 나라의 언어들이 들리는 거리를 헤치고 마추픽추 아랫마을,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로 가는 올란따이땀보 기차역으로 향했다.
올란따이땀보에서 아구아스 깔리엔떼스로 가는 기차는 잉카레일(Inca Rail)과 페루레일(Peru Rail)이 있다. 2019년 기준 가장 저렴한 가격이 60~70달러 정도였던 만큼, 남미에서 가장 비싼 기차가 아닌가 싶다. 페루의 최고급 기차답게 기차 내부 인테리어도 매우 깔끔하고 세련됐다. 서비스로 쿠키와 티까지 제공해 준다.
하루 종일 풍경을 향한 감탄 속에 쉬지 못했던 몸과 마음을 끌고 아구아스 깔리엔테스 마을 숙소에 체크인했다.
다인실 도미토리였지만 같은 방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녹초가 되어 쓰러져 잠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새벽 6시, 마추픽추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야 했기에.
다음날 에너지 풀충전 후 제대로 다시 본 아구아스 깔리엔테스 마을. 이른 새벽부터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저 넓고 깨끗한 축구장은 아마 마추픽추가 준 선물이겠지?
단체버스를 타고 놀랍도록 매끈한 산속 포장도로를 20분 정도 올라갔고, 드디어 그것을 마주했다.
나의 남미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New 7 Wonders of the World) 중 하나, 마추픽추!
한번 오르기도 힘든 봉긋한 산봉우리 한가운데에 잉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고작 100년의 영광을 누리고 스페인의 침공으로 몰락한 잉카 왕실의 별장이자 성소, 마추픽추. 서양 국가들의 침략이 있지 않았다면 이곳은 완전히 다른 입지를 가지고 있었겠지. 15세기에 지어졌지만 발견된 건 500년 뒤인 20세기라고 한다. 어찌나 정교한 기술을 썼는지, 돌벽들이 바위 사이에 카드 한 장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완벽해서 지진이 잦은 안데스 지형에서도 그 오랜 세월 무너지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유적지보다 더 탄성이 나왔던 광경은 바로 뒤편에 보이는 잉카 페이스(Inca Face)였다. 유적지 뒤로 거대한 거인의 얼굴이 누워있었다. 잉카인들은 이 얼굴이 도시를 수호하는 수호신이라 믿었다고 한다. 잉카인이 아닌 나도 평온히 누워있는 거인을 보니 자연스레 두 손이 모아졌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원령공주> 속 자연의 신 시시가미(シシ神), 사슴신이 떠올랐다.
지구 반대편 산등성에 마추픽추에서도 반가운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스폿에서 감탄사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어서 절대 지나칠 수가 없었다. 판초나 알파카 인형 등 촬영 소품을 아낌없이 빌려주면서 최선을 다해 서로의 인생샷을 찍어주는 모습을 보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따뜻했다. 멋진 사람들...
덕분에 돈이 없어 판초를 못 산 나도 온갖 색의 의상을 빌려 입고 평생 기억에 남을 사진들을 많이 얻었다.
해발고도 2430m로 상대적으로 낮은 지대에 위치한 마추픽추 주위를 훨씬 거대한 산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여러모로 신성한 장소에 온 느낌이 물씬 들었다. 무릉도원에 들어온 느낌이랄까.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게 가장 이국적이었던 여행지를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마추픽추라 대답할 것 같다.
마추픽추로 올라갈 땐 버스를 탔지만 내려갈 땐 다시 오지 못할 이곳을 만끽하고자 걸어내려 가기로 결심했다.
(투어 비용에 내려가는 버스가 포함되어있지 않아서 반강제적이긴 했다.)
"산을 내려가는 게 힘들어봤자지"
나와 동행들은 호기롭게 하산을 시작했지만 이내 터질 것 같은 다리와 함께 헉헉거리기 시작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동행들과도 고작 하루 안 사이인데도, 쉽지 않은 경험을 공유해서 그런지 묘한 애정과 끈끈함이 느껴졌다. 우리는 물을 나눠 마셔가며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라틴 음악을 크게 틀어 들으며 부들거리는 다리를 재촉해 하산에 성공했다.
남미여행의 반이 지나가니, 옷매무새에서 여행자의 아우라가 나기 시작했다. 겉모습만 보면 국적을 알 수 없는 여행자 혹은 노숙자 같았다. 그렇게 여행은 나를 조금씩 빚어갔다.
Machu Picchu, Peru_Key words
- 성스러운 계곡(Valle Sagrado)
- 친체로 (Chinchero)
- 피삭 (Pisac)
- 마라스 염전 (Salineras de Maras)
- 모라이 (Moray)
- 올란따이땀보 (Ollantaytambo)
- 아구아스 깔리엔테스 (Aguas Calientes)
- 마추픽추(Machu Picch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