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신뢰

03화. 사랑은 때로 거리를 허락하는 일

by 단슬강

꿈이 생긴 날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도서관 한 켠에서 집어 든 위인전 한 권이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 의사이자 신학자이자 선교사였던 그 사람의 이야기는, 아직 세상이 좁았던 내게 전혀 다른 크기의 삶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줬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메스를 들고, 믿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삶. 얇은 위인전 한 권이 심어놓은 그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그리고 깊이 남았다.

그 꿈을 품은 채 나는 신학과에 지원했다.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의료선교사가 꿈이라면 의대를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떤 공부를 이어서 하든, 내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먼저 아는 것이 순서라고 느꼈다. 선교사는 기술 이전에 사람이어야 했고, 그 사람됨의 뿌리를 먼저 내리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돌아가는 길처럼 보였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정직한 출발선이었다.

면접날, 교수님은 첫눈에 봐도 날카로운 분이었다. 말수가 적고 눈빛이 깊어서, 면접장 안의 공기가 괜히 팽팽하게 느껴졌다. 그분이 물었다. 왜 신학과에 지원했느냐고.

나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았다.

"저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과에 지원한 것이 아닙니다. 제 꿈은 선교사입니다. 어떤 공부를 이어서 하든, 제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 먼저 아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서 지원했습니다."

교수님의 눈빛이 잠시 나를 향해 머물렀다. 그리고 교수님의 표정이 바뀌었다. 날카로움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 처음 보는 무언가가 스쳤다. 흥미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그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나는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그녀도 같은 대학 영문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1년을 함께 치열하게 버텨온 우리가 나란히 증명해낸 결과였다. 그 사실이 괜히 뭉클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합격증을 내려놓았다. 더 멀리, 다른 도시의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하고도 선명했다. 교사가 되고 싶었으니까. 화려한 합격보다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더 먼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입학을 앞두고 그녀의 짐을 함께 들고 기숙사까지 데려다줬다. 가는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어느 순간 눈물이 났다.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내기 싫었고,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오히려 더 씩씩했다. 눈가가 살짝 붉어지긴 했어도 금방 닦아내고는, 울먹이는 나를 가만히 토닥였다. 스무 살의 그녀는 나보다 이미 한 발 앞서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오래 생각했다. 보고 싶을 것이다. 아마 많이.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길이 얼마나 그녀다운 것인지 알고 있었다. 붙잡는 대신 응원하기로 했다. 믿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더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은 때로 거리를 허락하는 일이라는 걸, 나는 그해 봄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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