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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26. 2021

시아버님 김ㅇㅇ 요셉 님 1/2

  "그거 다 죽음 질 딱는 일 아이가."


 "아버님, 세례 한번 받아 보실람니꺼? 신부님이나 수녀님이 오셔서 이야기하시는 것 들어 보시고 아버님이 싫으시면 '싫다.' 좋으시면 '좋다.' 하시면 됨니더."


 "하고 접다. (하고 싶다.)"

 " 그거 다 죽음 질(길) 는(닦는) 일 아이가."


 이 세상에서 내가 아버님과 제대로 주고받은 대화의 마지막 내용이다.


 79세이셨던 2001년 가을,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오시다가 높은 축담( 마루와 마당 사이에 만들어 놓은 높이, 폭 60센티 정도의 시멘트 공간)에서 넘어지셨다. 크게 다치신 데는 없지만 얼굴에 찰과상을 입고 제대로 잘 걸을 수 없게 되어 마산에 있는 노인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가까이 사는 큰시누이 부부가 정성껏 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바로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내성적이고 깔끔하신 성격에 식탐이 없으시고 항상 가벼운 몸이셨는데 더 많이 쇠약해지셨다. 게다가 난생처음 낯선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니 많이 불안해하고 계셨다. 안부를 주고받은 후 아버님 세례 문제를 조심스레 꺼냈다. 옆에 계시던 어머님이 단칼에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머할라꼬 그런 씰떼읎는 일을 하노? 망구(도대체) 아무 소용도 읎따."

 아버님께는 입을 뗄 기회도 주지 않았다. 옆에 있는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정작 어머님 당신은 60대 후반 무렵에 스스로의 결정으로 6개월 간의 교리교육을 끝내고 가톨릭 세례를 받아 놓으신 상태였다.


 어머님의 세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는 어느 날 시골집 TV 옆에 놓여 있는 성모상과 그 옆에 먼지 앉는다고 비닐에 싸서 놓아둔 두꺼운 성경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연을 여쭈었다. 그때 어머님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 주셨다.


 용하다는 점쟁이 집에 신수 보러 갔더니 점쟁이가 물었단다.

 "믿는 데는 있소?"

 "없소."

 "큰아들은 종교가 있소?"

 "천주교 성당에 다니요."

 "그럼 할머니도 큰아들 따라 성당 다니면 몸도 건강하고 운도 좋소."


 그 길로 바로 성당을 찾아가서 예비자 입교 신청을 하고 6개월간 성당이 있는 읍내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혼자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시면서 교리 공부를 끝내고 세례를 받으셨다고 한다. 본명은 모니카.

 끊임없는 사랑과 기도와 헌신으로 방황하는 아들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으로 만들어내신 위대한 신앙의 어머니 성녀 모니카에서 따온 세례명이다. 

 6개월 교리 공부 기간 동안 어머님을 번이나 만났는데도 아무런 언급도 없었던 터라 신기했다.

 세례 직후 돈 들고 재미 없다고 성당 발길을 뚝 고 나에게 충고하셨다.

 "성당 일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돈 너무 마이 갖다 바치지 마라."

 

 그때 마침 어머님의 친정 조카 부부가 병문안을 오셨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좋아하시는 어머님은 그분들과 병실 저쪽으로 가서 한참 정담을 나누시는 중이었다. 남편은 슬쩍 밖으로 바람 쐬러 나가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아버님과 단 둘만 남게 되자 나는 다시 세례 문제를 의논드렸다. 한 치 망설임이나 한 마디 질문도 의심도 없이 아버님은 바로 입을 떼다.


 "하고 접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다.

 

 "그거 다 죽음 질 는 일 아이가."


 마침 병문안 오신 두 분은 마산에서 성당 일을 열심히 하시는 적극적인 가톨릭 신자분들이셨다. 나는 그분들께 살짝 아버님의 의중을 전하고 세례를 부탁드리고 서울로 돌아왔다. 세례명은 요셉으로 말씀드렸다. 서울에서 나랑 같이 레지오 활동을 하는 형님들이 추천해 주신 세례명이다.

 죽음길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요셉 성인. 조용히 성모 마리아의 배필 역할을 맡아 예수님의 양육을 도우며 충실하게 성가정을 이끌어 오신 요셉 성인의 생애가 팔십 평생 성실하고 조용하게 농촌에서 살아오신 아버님의 일생과 비슷한 분위기로 연상되기도 했다.

 두 분이 바로 마산 본당으로 연결하여 아버님의 세례를 성사시켰다. 김삼룡 요셉.

 며느리인 나의 제안에는 강하게 반대하셨지만 친정 조카 내외의 세례 추진에는 어머님도 그냥 따르셨던 모양이다.


 하느님이 당신 자녀로 삼으시어 사랑하고 불러주신 시아버님 김삼룡 요셉님.


 이렇게 시작된 병원 생활을 서너 달 하시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셔서 봄, 여름, 가을을 보내시고 2002년 겨울의 초입인 11월 20일, 음력 시월 보름날 새벽 세 시에 세상을 떠나셨다.


 당신이 태어나신 동네에서 형제분이 평생 같이 살아오셨다. 결혼하여 본가의 바로 밑엣집으로 분가하신 후 두 번 이사하신 생애 네 번째 집에서 이승에서의 삶을 접으시고 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우리 큰딸은 새벽 세 시 바로 그 시간, 잠결에 할아버지께서 자기를 찾아오셨더라고 분명히 기억했다. 별로 표현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사랑하는 큰아들의 장녀인 첫 손주, 우리 큰아이를 가장 마음에 두셨던 모양이다.


  아버님이 숨을 거두신 걸 알아차린 어머님은 가까운 마산에 살고 있는 큰딸에게 먼저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여러 차례 전화 다이얼을 돌렸지만 뚜뚜 뚜뚜 통화 중인 신호만 계속 들려오기에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전화기와 씨름하다가 할 수 없이 네 시가 다 되어서야 서울 우리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고 한다.

 잠귀 밝은 내가 바로 받았고 비보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남편을 대신해서 시동생과 시누이들에게 연락을 하고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남편은 수십 번 다녔던 그 고속도로에서 마지막 진입로를 놓쳐 도착이 조금 지연되었다. 아버님 별세의 충격과 장남으로서 감당해야 할 짐의 무게가 또 한 번 무겁게 남편의 어깨를 눌러 왔던 것 같다.

 일산 행신에서 출발하여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시동생으로부터 세 시에 별세하셨다는데 왜 네 시에 연락했냐는 추궁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지만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했다.


 평소 별다른 내색이나 주장 같은 것이 별로 없으셨던 아버님.

 세상과 이별하시는 그 순간에는 당신의 마지막 소식을 장남인 아들에게 먼저 알리고 싶은 의사를 강력하게 표현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원하시던 세례도 기적처럼 받고 죽음으로 가는 길을 잘 닦으셨으니 은총 충만한 삶을 잘 마무리하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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