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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25. 2021

작은아버님

   어른의 향기

 

 7형제 중에 막내 쪽에 가까운 나는 친정아버님보다 10년 정도 더 오래 사신 셋째 작은아버님에 대한 추억이 많다.

 아들만 다섯을 낳고 키우신 우리 할머니, 동래 정씨 정숙이 할머님. 장남인 우리 아버지와 둘째 작은 아버지는 60을 채 못 넘기고 일찍 돌아가셨다. 우리 집과 둘째 작은집, 셋째 작은집, 이렇게 세 집은 한 동네에 살았다.


  슈퍼마켓이나 할인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가 전혀 없었던 시절, 학교 앞 시장이 시작되는 골목 초입에서 작은아버지는 주로 식료품을 다루는 꽤 큰 잡화상을 운영하셨는데 사람들은 기름집이라고 불렀다. 상점 한쪽에 설치한 커다란 무쇠솥에 참깨나 들깨를 넣고 볶아서 참기름, 들기름을 짜서 팔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모든 과정이 자동화되어 있지만 60년대인 그때는 모든 일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깨가 충분히 익을 때까지 커다란 주걱으로 저어 주고 다 익으면 김이 풀풀 나는 뜨거운 깨를 바로 옆에 있는 압착기로 옮겨서 손잡이를 몇 바퀴씩 돌려 가며 위에서 온 몸에 힘을 실어 꽉 누르면 고소한 기름이 졸졸 흘러나왔다. 그것을 진로 소주병에 옮겨 담아 파는 것이다. 기름을 다 빼고 나면 깻묵이라는 납작하고 둥근 덩어리가 남는데 조금씩 부수어 먹으면 고소하고 맛있는 훌륭한 고급 간식거리였다.


 천장에 달려 있는 줄을 따라 빨래집게로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던 미원, 미풍 상표의 조미료 봉지들, 진열대에 쌓여 있던 설탕, 밀가루, 당면, 국수, 식용유 등 다양한 상품으로 가득 찬 꽤 넓은 가게는 명절 때면 사람들로 붐볐다. 작은아버지가 계실 때면 그 앞을 지나가다 인사드리는 우리들에게 꼭 한두 푼씩 용돈을 쥐어주시곤 했다.


 1985년, 64세라는 아쉬운 연세에 후두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작은아버지는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셨다. 한참 일손이 달릴 때는 나보다 네 살 많은 우리 작은오빠도 상점 일을 도왔다.


 인심 좋고 인물 좋으신 학자풍의 작은아버지는 동네 대소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셨고 축의금이나 조의금도 항상 넉넉히 준비하셨다. 제사 많은 우리 집에 따끈따끈 갓 뽑아낸 귀한 참기름을 항상 챙겨 보내 주시고 명절에는 넥타이까지 깔끔하게 갖춰 입은 양복 정장 차림으로 윗도리 안주머니에 빳빳한 10원짜리 새 지폐를 두툼하게 준비해 다니셨다.

 제일 큰집인 우리 집과 둘째 작은집, 두 군데서 차례를 모셨는데 차례가 끝난 후 다 함께 밥을 먹을 때가 작은아버지께서 명절 선물 돈을 조카들에게 나눠주시는 시간이다.

 다섯 집의 자손들이 22명. 그중에서 장성한 몇 명을 빼고 여남은 명의 꼬맹이들이 우르르 작은아버지 앞에 모여들면 작은아버지는 빳빳한 십 원짜리 지폐 뭉치를 들고 무조건 한 장씩 차례차례 손에 쥐어 주셨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 명절이 되면 우리는 모두 작은아버지가 언제 돈을 나누어 주시는가에 관심이 총집중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그 순간을 놓쳐서 돈을 못 받은 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서운한 명절이 되어 버렸다.


 새 학기가 되면 지난해 달력의 하얀 뒷면으로 책 꺼풀 입힌 교과서랑 엄마를 졸라 새로 구입한 표준 수련장, 표준 전과 또는 동아 수련장, 동아 전과를 챙겨 작은아버지 댁으로 들고 다. 멋진 필체로 정성스럽게 학년, 반, 이름을 책 표지마다 일일이 적어 주시는 게 연례행사였다.


 나보다 한 살 많지만 학년은 같았던 사촌오빠가 그 집의 장남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에 다녀온 경주 수학여행. 집결 시간과 장소는 새벽 6시, 집에서 제법 떨어져 있는 부전역이었다. 앓고 계셨던 아버지 대신 작은아버지가 자전거 앞 뒤에 나랑 오빠를 태우고 기차가 출발하는 부전역까지 데려다주셨다. 

 아직은 컴컴한 시간, 희부염한 새벽 어둠 속에서 쌀쌀한 바람을 가르며 앞 뒤에 아들과 조카, 두 꼬마들을 태우고 경쾌하게 페달을 밟으시던 젊은 시절의 작은아버지 모습. 내 마음속 한 폭의 그림이다.

 2박 3일의 수학여행을 끝내고 다시 부전역으로 돌아왔을 때도 작은아버지는 마중 나와 계셨다. 사촌오빠와 나에게 근처 식당에서 짜장면 저녁을 사 주시고 다시 집에까지 태워다 주셨다. 내성적이고 얌전하고 조그마했던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내 남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작은어머니께서 학교 앞 월성 양복점에 동생을 데려가 그 당시 제일 좋은 스마트 학생복을 맞춰 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작은아버지 가게 앞에서 반찬과 야채 장사를 시작하셨다. 준비해 간 물건들을 미처 다 팔지 못해 저녁 식사 때를 놓치는 날도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살림집에서 내 온 저녁 밥상에서 밥을 두어 숟갈만 드시고는 그 상을 도로 집으로 들여가지 못하게 밥그릇에다 국이나 물을 부으셔서 그 밥상을 형수인 우리 어머니께 건네주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여러 번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결혼 후 추석과 설 명절 때면 매번 남편과 함께 작은아버지 댁으로 인사를 다녔다. 그럴 때면 우리가 달성 서가 판서공파 24세 손이며 항렬로는 바를 정, 동녘 동 자를 쓴다는 족보 이야기와 여러 가지 덕담을 들려주셨다.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작은아버지가 남기신 따뜻한 삶의 발자국은 내 유년시절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그립고도 귀한 추억이 되어 60을 넘은 내 마음속에 아직도 또렷이 새겨져 있다.

 나도 그렇게 넉넉한 어른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한다.


 '작은아버지 서ㅇㅇ님, 감사합니다. 천상 낙원에서 영원 복락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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