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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27. 2021

시아버님, 김ㅇㅇ 요셉 님  2/2

 "나는 너거들 모두를 사랑한다."


 나보다 열한 살 어린 손아래 동서가 결혼한 지 3년쯤 되었을 때 맏며느리인 나와의 관계가 좀 시끄러웠다. 내가 소통과 갈등 해소에 무척 서툴렀던 탓이 크다.

 아버님과 나는 우연히 시골집 대문 밖 한길가에 같이 있게 되었다. 내리쬐는 따뜻한 햇볕 아래 아버님은 신작로 길가 인도에 쪼그리고 앉아 계셨고 나는 그 옆에 그냥 서 있었다. 평소 말씀이 으신 편이라 서로 아무 말 없이 무심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는 길 건너편 논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앞뒤 말을 다 뚝 잘라 버린 채 아버님이 한 말씀을 하셨다.


 "나는 너거들 모두를 사랑한다."


 나이 70이 넘은 시골 할아버지의 입에서 뜬금없이 나온 '사랑'이라는 단어. 무척 생뚱맞게 들릴  있었을 텐데 그때 그 순간은 전혀 어색하지 않고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 담겨 있는 아버님의 점잖으신 마음.

 나도 바로 대답을 드렸다.


 "네에."


 그 이상 이어지는 다른 대화는 없었다. 잠시 후 아버님은 몸을 일으켜 으로 들어가시고 나도 그 뒤를 따랐. 

 동서와 나 사이의 갈등에 대해 그 동안 아무 내색도 없으셨지만 아버님의 심경이 어떠하셨는지,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셨는지 내게 오롯이 전해져 왔다. 

 어느 쪽도 판단하거나 내치지 않고 똑같은 자식으로 품어 안고 싶다는 말씀이셨다.


 '그러시구나ᆢ.'


 자주 상경하시는 어머님과는 달리 드물게 우리 집을 다녀가시는 아버님은 계시는 동안 내어 드린 새 양말과 내의는 결코 가져가지 않으시고 깨끗이 개어서 한 옆에 챙겨 두셨다. 그동안 베란다에서 피우셨던 담배꽁초들은 야무지게 신문지에 똘똘 뭉쳐 끝을 비틀어 말아 재떨이 옆에 얌전히 놓아두고 재떨이도 깨끗이 비워 제자리에 갖다 두셨다.


 내가 결혼한 후 신제품으로 막 나오기 시작한 트라이 남성 트렁크와 반소매 백양 메리야스 러닝을 사다 드리면 많이 좋아하셨다. 마다 자주 사다 드렸다. 언제부턴가는 이제 죽을 때까지 입을 만큼 넉넉하니 더 이상 사 오지 말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드러내는 법 없이 조용히 뒤에서 당신 자리를 지키고 계시던 모습은 온유와 겸손의 표양이셨다.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셨는데 부모님의 꽤 많은 유산은 대부분 장남인 큰형에게 돌아갔다. 둘째도 아닌 셋째, 막내인 아버님은 거의 물려받은 재산이 없었다. 적은 농토로 시골 고향땅에서 3남 2녀를 낳아 기르시면서 병도 많이 앓으시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환갑 이후로는 장남인 남편의 강력한 권유와 어머님의 희망사항으로 농사일을 거의 접으시고 논은 남에게 맡겼다.


 10남매의 막내로 자라나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오신 시어머님도 고생하셨고 그 사이에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남편도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아버님을 따라, 또는 편찮으신 아버님을 대신해서 어릴 때부터 모내기, 밭매기, 타작하기 등 농사일 도우느라 구슬땀 흘리던 남편과는 달리 열다섯 살 손위이신 장손 사촌 형님은 한 벌 짜리 모시옷을 아래 위로 챙겨 입고 접이식 부채를 펼쳐 들고 할랑거리며 논둑길을 오가곤 했다고 한다.

 그 동네에서 최초로 부산대학을 졸업하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두 달 전, 추석 벌초하느라 남편과 둘이 함안 본가로 내려갔다. 열 명 남짓 육촌 내의 남자 친척들만 모여 두 편으로 갈라 멀리 떨어진 곳과 가까운 곳에 있는 산소들을 나누어 벌초하고 다시 읍내 식당에 모여서 식사를 하고 헤어지는 게 성묘 일정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아침 식사 뒷바라지하느라 한참 바빴다. 어머님은 방에서 아버님께 밥을  떠먹여 주고 계셨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외출복으로 바꿔 입으시고는 벌초하러 대문 나서는 아들 뒤를 따라 나가 버리셨다.

 방으로 가 보니 아버님은 장롱문에 기댄 채로 앉아 계시고 그 옆에는 밥 떠 먹이던 숟가락이 국그릇에 걸쳐진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무런 설명이나 도움말을 들은 것도 없이 그때부터 아버님 돌보는 일이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아침밥을 마저 먹여 눕혀 드리고 대소변 기저귀를 갈아 드리고 옷을 갈아 입히고 씻기고 먹이고ᆢ.

 환자로서의 고통이나 불편함에 대해 짜증 내거나 힘들게 하지 않으셔서 어려운 일은 었다. 

 햇빛 짱짱한 초가을 하루를 아무 말도 못 하시는 아버님과 그렇게 둘이서 보냈다. 그때 내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이 세상 삶을 끝내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아버님을 다시 만난다면 조용히 그분 곁에 머물면서 혼자 간직하고 계시는 내면의 소리들을 많이 들어 드리고 싶다.

 사느라고 바빠서, 말해 본 경험이 없어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하지 못하셨던 당신 마음의 소리들을 아무 사심 없는 편안한 마음으로 들으 따뜻한 소통과 이해와 공감의 시간들을 나누어 보고 싶다.


 시아버님 김삼룡 요셉님.


 천상에서 영생복락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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