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Oct 06. 2021

퀴즈 올림픽

   기억과 추억


 40줄에 들어선 우리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 정말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모습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


 요즘은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삼사 년 전 손주들의 유치원 졸업 기념 발표회엘 참석했다. 꼬마 유치원생들이 비싼 의상을 대여해서 똑같이 갖춰 입고 유행하는 걸 그룹의 노래와 춤동작을 흉내내는 것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동요가 실종된 유치원.  많이 낯설었고 씁쓰럼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자란 덕분에 케이팝이 전 세계를 열광시키게 되었을까? 여행지 오스트리아 식당에서는 우리들에게 '강남 스타일'을 연주해 주었고 스페인의 빌바오 광장에서는 10대로 보이는 청소년들이 밤늦게까지 한국 걸 그룹 노래에 맞추어 열광적으로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에 내가 나오기를 소망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다섯 번씩이나 나오게 되었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 학교 대표로 두 번 참석한 부산 동양 방송 TBC 퀴즈 올림픽.

 서른 살에 저축추진중앙위원회에 잠깐 근무했던 인연으로 초대 손님으로 출연했던 KBS 8030 아침 생방송 토크쇼.

 바로 뒤이어 평범한 민 세 가정을 선택, 취재하여 한 가정당 15분씩 일상의 삶을 방영한 전두환 대통령 취임 5주년 기념 특집 프로.

 이 프로를 편집하기 위해서는 사흘이나 촬영을 했다. 동네 이웃 아주머니들도 동원되었다. 제법 두툼했다고 생각되는 출연료를 받아 기념으로 LG 전기 청소기를 샀다. 큰 맘 먹고 생애 처음 구입한 전기 청소기. 요란한 작동 소리에 섞여  방바닥의 자잔한 쓰레기들이 따다닥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참으로 경쾌하게 들렸다. 빗자루로 쓸어낸 후와는 차원이 다른 깔끔함에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또 하나가 더 있다. 성당 활동으로 주부교사를 할 때 일이다. 다섯 명이 뜻을 모아 다도를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혼자 사시는 교우 할머니 선생님 댁으로 모였다.

 얼마 후 교우들의 취미 생활을 취재해서 방영하는 평화방송 프로그램에 우리 다도팀이 소개되었다. 모두들 고운 한복으로 차려 입고 얌전히 차를 준비하고 나누는 모습이 방영되었다.


 가장 추억 거리가 되는 것은 단연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방송 출연이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학교 대항 퀴즈 올림픽 대회에 출전하게 되어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갈 니까 준비하라고. 1966년 부산 TBC 개국 1주년 기념행사였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고 나보다 열네 살 많은 큰언니는 방직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 해 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언니가 미리 나의 중학교 교복을 준비한다고 사다 둔 까만 모직천이 있었다. 그 천을 들고 양장점에 가서 잠바 주름 스커트를 맞추었다. 내가 목표로 하고 있었던 중학교를 비롯하여 그 당시 대부분 여자 중학교 교복은 주름치마에다 상의는 흰 줄이 있는 세일러복이었다. 중3이 되어 키가 쑤욱 자랐을 때에 잠바 부분을 떼내고 허리 벨트 부분을 만들어 명실상부한 주름치마로 고쳐 입었다. 언니와 어머니의 절약 작전이었고 아주 유효했다.


 새로 맞춘 잠바스커트 밑에 예쁜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선생님을 따라 방송국으로 갔다. 학교 대표로 뽑힌 남학생 명과 여학생 명 그리고 응원단 이십여 명이 함께 갔다. 한 학년 학생수가 오백 명이 넘었던 때라 뽑힌 아이들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흑백 티브이를 갖춘 집도 드물었던 때다.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환한 조명등들이 방향과 높이를 달리하며 계속 움직였다. 정답을 맞히면 앞에 놓인 커다란 티브이 화면을 통해 내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다가왔다. 응원단 친구들의 상기된 표정들도 화면을 통해 비치니 참으로 신기했다. 대표로 뽑힌 네 명은 말할 것도 없고 응원단으로 뽑혀 온 아이들도 가문의 영광이었다.


 우리 부산진구 가야동 촌뜨기들의 엄청난 문화 체험이었다.


 정면에 나란히 놓인 두 테이블에 우리 학교 대표 네 명과 상대 학교 대표 네 명이 각각 자리를 잡았다. 한 명 한 명 앞에는 손 닿기 쉬운 자리에 벨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회자 아나운서가 문제를 말하면 정답을 아는 사람이 재빨리 벨을 누르고 사회자의 지명을 받아 정답을 말하는 식이었다.


 응원단 아이들은 의자도 없이 대표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맞은편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답을 맞히면 앞에 앉아 있는 응원단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놓치아쉬워하는 표정들을 뒤로한 채 상대 쪽으로 발언권이 넘어갔다. 간단한 상식문제와 암산 문제 정도로 요즘이라면 똘똘한 유치원 어린이들만 돼도 다 알 만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문제 하나.

 "진달래 꽃잎은 몇 장일까요?"

 삐이익 벨 소리.

 "다섯 장."

 정답입니다.

 ㅎㅎ


 촬영이 시작되기 전 프로그램 주제가 노래 연습부터 했다.

 큐 신호가 들어오면 다 같이 입을 짝짝 벌려 가며 큰 소리로 불러야 했다.


 퀴즈 퀴즈 퀴즈 올림픽

 퀴즈 퀴즈 퀴즈 올림픽

 기다리던 이 시간

 정다운 우리 시간

 퀴즈 퀴즈 퀴즈 올림픽


 노래는 단조롭고 쉬웠다. 얼마 안 가 모두들 자신 있게 목청을 돋우었다. 쏟아지는 조명등 불빛 아래 어리둥절 쫄아 있었던 꼬맹이들의 오종종 겁 먹었던 얼굴들이 발갛게 상기되어 활짝 피어났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맑은 눈들도 반짝반짝 빛났다.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스르르륵 들리면서 촬영이 시작되자 피디 아저씨의 힘껏 휘두르는 팔 동작에 따라 다 같이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퀴즈 퀴즈 퀴즈 올림픽 ~~!!


 점점 더워지는 조명등 아래에서 땀깨나 흘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서 몰두하다 보니 우리 학교가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 학교로서도 우리로서도 커다란 경사였다.


 얼마 후 똑같은 방송국 행차를 다시 한 번 다녀왔다. 준결승전이었다. 대표 선수 교체 없이 그대로 갔다. 응원부대 친구들도 신이 나서 이미 배워 익숙해진 노래를 더더욱 열심히 크게 불렀다.


 방송 출연료 격으로 받아온 상품은 알록달록 가루약 입자로 된 비타민 영양제 한 병과 사이즈도 안 맞는 납작한 끈 달린 농구 운동화 한 켤레였다. 자랑스레 품에 안고 집으로 들고 왔을 텐데 누가 먹고 누가 신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학교 대표로 출연했던 남학생 두 명은 부산중ㆍ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로 진학했고 나랑 다른 여학생 한 명은 경남여중ㆍ고를 거쳐 부산대로 진학했다.


 이듬해 중학교로 진학한 어느 봄날,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해가 바뀌어 퀴즈 올림픽 방송에 다시 우리 학교가 나가게 되었는데 대표로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정 선수 출연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조퇴 같은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하고 가슴 졸이며 중학교 수업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방과 후 버스로 거의 1시간 이상 걸리는 제법 먼 통학길을 급하게 귀가해서 초등학교 교무실로 달려갔다. 시간이 늦었는지 학교는 텅 비어 있었고 운동장은 조용했다. 전화 같은 통신 수단이 거의 없었던 때라 달리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졸였던 마음을 내려놓고 혼자 터벅터벅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부정 선수 출연의 오명은 쓰지 않게 되었다.

 1967년의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선애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