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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16. 2021

얼렁뚱땅 엄마 1/3

  수능 일기

 이틀 후, 11월 셋째 목요일이 수능고사일이다.

 10년, 2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세 아이들이 수능을 치렀던 시간들, 그 분위기와 그 장면들은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하다.


 아이가 셋이고, 장녀인 큰애와 막내인 아들은 열 살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큰애의 학업 뒷바라지에 전적으로 매달리지는 못했다. 더구나 큰애가 고3이었던 해에는 가사 도우미의 도움도 전혀 없이 일 년 전에 시작한 논술 공부방 수업에 폭 빠져 지내던 때였다. 책 읽고 자료 준비하고 수업하고ᆢ. 그 일은 내 적성에 딱 맞았다. 아이들의 방과 후 매일 4시간 이상 이어지던 강행군 수업이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젊은 힘으로 신나게 몰입했다. 다행히 공부방이 내부 목조계단 하나로 이어지던 2층 우리 집 바로 아래층이긴 했다. 골목 청소를 비롯하여 돌아볼 일 많은 단독 주택 주부로 살며 공사다망했던 나는 학교 입시 정보에 대해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지 못했다.


 큰애가 중3이었던 어느 날,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 도보로 1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외고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남고, 여고, 여중, 외고, 네 개의 학교가 한 곳에 모여 있는 커다란 사학재단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그냥 스쳐 지나다니던 곳이었다. 개교한 지 1년 되었다고 했다.

 마침 원서 접수 기간이었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큰애는 외고로 진학하기로 했고 팝송 즐겨 듣기로 영어를 워낙 좋아했으니 당연히 영어과로 원서를 접수했다. 영어과가 가장 커트라인이 높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과외나 학원 수강 같은 사교육의 도움이나 별다른 입시 준비가 없었는데 하니 합격이 되었다.

 1995년, 26년 전 일이니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이다.


 문제는 입학 후 학교 생활이었다. 중학교 3년 동안 사교육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소위 선행 학습이라는 것이 전무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어만 좋아했으니 수학, 과학 등에서 많이 밀렸다. 이미 열혈 어머니들의 치밀한 진두지휘 아래 오랜 기간 사교육으로 무장해 온 아이 틈에서 많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잠 속으로 도피할 때가 많았다. 게다가 위로나 배려보다는 압박과 나무람이 더 많았던 집안 분위기도 한몫 했을 것이다. 엄마인 내가 일 중심형 인간, 전사형 성격이니까ᆢ.


 고3 수험생 엄마인 나는 중 2, 초등 1년인 두 동생들의 학교 생활, 주 6일 근무인 남편의 직장 생활, 가족들 의식주 생활 등에 대한 뒷바라지와 성당 활동, 논술 수업 등으로 시간을 쪼개 쓰고 있었다. 그때는 학교 급식도 없었고 배달 음식은 꿈도 꾸지 않았으며 외식 한번 나가려면 남편에게 엄청 공을 들여야 했다.

 큰애가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고 1교시보다 먼저 시작하는 0교시 수업맞춰 일찍 등교하는 걸 도와줄 뿐이었다. 될 수 있으면 저녁 도시락은 따끈한 집밥을 준비해 학교 수위실까지 가져다주느라 동동거리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외고 3년의 학창 생활이 우리 큰애에게는 큰 시련의 시기, 우울한 시간이었다. 학생들의 80% 이상이 강서지역의 사교육 중심지, 목동 출신이었다. 고3이 되면서 내신의 불리함을 피하고자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로 빠지는 애들도 속출했지만 그래도 큰애는 끝까지 성실히 그 자리를 지켰다. 3년 내내 결석은 거의 없었다.


 수능 시험장은 집에서 버스로 두 구역 떨어진 여고였다. 수능 시험이 시작되기 54일 전부터 성당에서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엄마들이 모여 수험생들을 위한 묵주 기도를 바쳤다.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녔다. 수능 당일에는 아침에 시험 고사장까지 큰애를 배웅해주고 성당에서 하루 종일 1일 피정을 다.

 성당에서는 해마다 수능 당일에는 학부모들에게 따끈한 점심까지 제공해 주며 하루 종일 피정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기도와 찬양과 좋은 특강들로 진행된다.


 성당 일정이 끝나고 짧은 겨울해도 저물어 스산해진 추운 저녁 시간, 낯선 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큰애를 기다렸다. 점점 어두워지며 차가운 어스름이 깔리는 썰렁한 학교 운동장을 지나 큰애가 나오고 있었다. 얼른 다가가며 이름을 불렀다. 선하고 순한 얼굴에 늘 잘 웃던 큰애다. 하루 종일 긴장 속에서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후줄근해져 나오는 큰애의 하얀 얼굴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살스럽게 표현할 줄 모르는 내 성격대로 덤덤하니 큰애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울컥했던 감정은 그대로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제라도 '우리 선한 큰애에게 좀 더 잘 해 줘야지.' 하는 다짐으로 되살아난다.


 외고 특례로 원하던 대학의 영문학부에 쉬이 합격했다.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했더라도 중학교 성적이 좋았던 큰애는 무난히 그 대학 그 학부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다. 섣불리 사전 지식도 없이 덜컥 외고를 지원하여 어두운 삼 년, 치열한 경쟁으로 점철된 힘든 학창 시절을 보내게 한 것이 아닌가?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외고의 2회 졸업생으로서 좋은 인연으로 지금까지 이어오는 귀한 우정들이 있으니 그 또한 귀중한 보물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큰애에게 말하고 싶다.


 "클라라, 정말 고생 많았어. 힘들었지? 애썼다.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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