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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17. 2021

얼렁뚱땅 엄마  2/3

  수능 도시락

 큰애가 대학으로 진학하고 둘째는 중3, 막내도 초등학생이 되고 보니 좁고 낡은 단독주택은 용량 부족이 되어 버렸다. 마침 근처에 큰 평수의 민영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8년을 살아온 단독 주택을 전세 놓고 아파트로 전세 이사를 다. 꽤 큰 방 네 칸과 넓은 거실, 두 개의 욕실, 우리 다섯 가족에게 넉넉한 공간이었다.

 논술 공부방은 엄마들의 입소문을 타고 제법 성황을 이루었다. 안방 한 벽면에 4인용 테이블을 붙여 놓고 4명씩 팀 과외식으로 2시간짜리 주 1회 수업을 했다. 외고 학생들까지 팀을 짜서 찾아왔다.


 그때만 해도 15층 계단형 아파트 한 통로의 서른 가구 이웃들은 거의 안면을 트고 살았다. 숟가락 숫자까지는 몰라도 몇 층 몇 호 가족이라는 건 다 알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으며 친하게들 지냈다. 특히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으신 앞집 마리아 형님은 같은 성당 교우이신데다 성격이 소탈하셔우리 두 여자들은 서로 이물 없이 마음 편하게 두 집을 드나들었다. 먹거리랑 동네 뉴스도 함께 오갔다.  


 두 살 터울 남매를 키우시는 형님 댁의 장녀는 우리 큰애가 졸업한 외고를 다니고 있었고 주말에만 오는 아들은 기숙사형 특수 사립고에 다니고 있었다. 소재지가 경기도 광명이었다. 진성 학원 재단이 높은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는 사학 명문고를 만들어 보겠다는 큰 꿈을 품고 그 동안 축적한 학원 경영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을 열었다고 한다. 설립한 지 2년 되는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추첨이 아닌 입학시험을 통해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경기도 학생들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광명에 가까운 목동 학생들이 진학 목표로 삼는 학교여서 입학 경쟁률도 높고 학생들 수준이 높아 학습 여건이 좋다고 했다.

 귀가 솔깃해진 나는 학교 설명회에 참석해 보았다. 둘째는 그 학교를 선택하기로 결정 내렸다. 입시를 치르고 합격 통보를 받고 입학식을 가졌다.


 집을 떠난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저도 나도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주 6일 등교하던 때라 월요일 아침 등교시켜 주고 토요일 오후 집으로 데려오는 일정이었다.

 첫 일주일을 보낸 주말, 둘째가 저만치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둘째를 품에 안고 함께 엉엉 울었다.

 처음 한 달 간은 둘째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리며 너무 보고 싶었다. 왕초보의 어설픈 운전 솜씨로 광명까지 달려가 은 벽돌담과 굳게 닫힌 교문만을 한동안 바라보다 돌아오기도 했다. 곧 익숙해지긴 했지만 안의 자식을 떼 보낸다는 것이 참 많이 슬프고 마음 아팠던 날들이었다.


 1997년도의 기숙사 학교는 결코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교실 한 칸에 60개의 침대가 마치 군인들의 내무반 숙소처럼 2층으로 주욱 줄지어 놓여 있고 교실 입구에 야간 담임 선생님 한 분이 같이 주무시며 생활 지도를 하시는 방식이었다.


 전교 1등부터 50등까지의 학생들에게는 특별 독서실 자리가 주어진다고 했다. 중학교를 수석 졸업했던 둘째는 고등학교에서도 3년 내내 상위권을 유지했다.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가 다 그러했듯이 완전 입시 위주의 학원 같은 체제였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선발되어 기숙사형 집중 교육을 받으니 당연히 대학 진학률도 좋았다. 학교 지명도도 높았다. 신입생들의 과반수가 서울 학생들이었다. 그러자 학교 근처 거주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왜 경기도 아이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서울 아이들이 빼앗느냐? 경기도 소재 학교이니 서울 학생들을 받지 말라.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울 아이들의 진학금지되었다.


 집에 돌아온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 등교 시간까지의 주말 내내 둘째는 집에서 TV 시청과 오답 노트 작성, 이 두 가지만 했다.

 다른 친구들은 토요일 귀가 후부터 일요일 밤까지 하루 반 동안의 주말 귀가 시간을 이용해 특별 과외와 학원 수업에 열중한다고들 했다. 토요일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학원으로 향한다고도 했다.


 둘째는 고등학교 3년 내내 학원이나 과외 등 사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학교 자율학습 시간에 학습지를 7,8 종류 푼다고 들었다. 그것도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학습지 구독을 청구해 올 때는 종류를 막론하고 무조건 응해 주었다. 나보다 둘째가 훨씬 더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마웠을 뿐이다. 나는 둘째가 공부하는 학습 교재의 이름들도 잘 몰랐다. 틀렸던 문제를 찾아내어 오려서 일일이 풀로 붙여가며 두툼한 오답노트를 만드는 모습만을 종종 보았다. 


 나는 1주일 동안 모아 온 빨랫감이교복, 실내화를 씻어서 준비해 주고 학교와 학부모들의 공식적인 모임에는 반드시 참석하였다. 단체 간식을 넣어주고 에어컨 설치, 독서실 인체공학적 기능성 의자 비치 등 신설 학교의 시설 확충 기부금을 부담하는 적인 뒷바라지에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고3이 되고 대학 진학 입시가 눈앞에 다가왔다.

 학교와 담임 선생님께서 수시 입학을 위한 모든 일을 정성껏 준비해 주시고 아이와 함께 애써 주셨다. 그 덕분으로 좋은 대학 좋은 학부에 수시 입학으로 합격했다. 담임 선생님께 진정 감사드렸다. 부모인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합격 소식을 전해 들은 가족 모두 정말 기뻐했다. 

 수능은 과목당 일정 커트라인 점수넘으면 된다고 했다.


 수능 당일, 학교에서 점심 준비랑 다 한다고 하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그날은 교우들과 함께 남양 성모 성지로 수능 입시 기도 모임을 갔다. 수능시험장까지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도 학교에서 다 맡아서 해 주셨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둘째는 수졸업자로 졸업식 날 단상에 올랐다.


   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둘째가 불현듯 이런 말을 했다. 마치 이제야 말할 수 있다는 듯이.

 수능 당일날, 다른 많은 엄마들은 보온 도시락에 따뜻한 밥과 국, 특별 반찬들을 준비해서 학교 앞으로 가져와 시험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오르는 자녀들에게 건네주고 응원해 주었는데 자기는 학교에서 준비해 준 차가운 도시락, 나무 젓가락이 잘 들어가지 않는 딱딱한 찬밥을 먹었노라고ᆢ.


 에구~~.

 구멍이라도 있다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미안했. 미안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했다. 내가 아무리 바빴기로서니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수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마음을 놓았던 것일? 학교 말만 곧이곧대로 듣고 다른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던 무심했던 나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다른 학부모 엄마에게 한번 물어보기라도 할 걸 ᆢ.

 무엇보다도 그날 큰 시험 앞에서 혼자 심란하고 외로웠을 어린 둘째에게 너무너무 미안했다.

 어쩔 수 없이 얼렁뚱땅 엄마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

 

 둘째에게 보내는 메시지


 "카타리나, 고마워, 미안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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