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2월부터 1988년 2월까지 4년 2개월을 살았던 5층짜리 계단식 18평형 서민 아파트. 살고 있었던 강서구 화곡동에서 개화산으로 남편과 가볍게 산책 나선 길. 개화산 초입에 건설 중인 이 아파트의 모델하우스를 구경하는 순간 바로 매입을 결정했다. 13평형 5층 꼭대기 낡은 주공 아파트에서 18평형 삼빡한 신축 아파트의 로열층 3층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결혼 후 다섯 번째 집이었던 이 아파트에서의 층간소음은 색달랐다.
"ㅇㅇ야, ㅇㅇㅇ호로 와."
카랑카랑하니 높고 빠른 30대 중반의 아줌마 목소리가 계단에서 크게 울려 퍼진다. 두 집씩 마주 보며 5층까지 계단으로 이어지는 서민 주택. 그 당시 같은 계단을 쓰는 열 집은 거의 한 마당을 쓰는 커다란 이웃 공동체 같았다. 특히 신축 입주 동창들이라 더 그랬다. 지금처럼 앞집 가족들 얼굴조차 다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통로를 통틀어 열 집의 웬만한 가정 사정은 서로서로의 입을 통해 거의 다 꿰뚫고 지냈다.
아주머니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한 집 빼고 아홉 집 안주인들은 모두 전업주부였다. 아이들도 비슷비슷했다. 아이들을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고 난 아침 시간, 어느새 사뿐하게 계단을 타닥타닥 가볍게 딛고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 뒤이어 큰 소리로 현관 밖에서 엄마들을 호출하는 주인공 아주머니. 5층에서 야무진 아들 한 명을 키우며 일손도 엄청 빠르고 자기 관리도 깔끔하게 해내는 소위 똑순이과였다. 어느새 아이 섀도 눈 화장까지 깔끔하게 끝내고 파마머리도 단정히 귀 뒤로 싸악 빗어 넘긴 날렵한 차림이다.
나이는 20대 후반인 나보다 조금 많았다. 남편과 아들이 집을 나서고 후다닥 집안일을 끝내면 바로 그날 모일 집을 물색해서 계단참에서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 댄다.
그리고 덧붙인다.
"후딱후딱 해치우고 오지 않고 뭐해? 얼렁얼렁 와!"
목소리에 쨍하니 힘이 실린다. 카리스마 넘치게 닦달하는 실력도 만만치 않다.
어느 한 집에 모여 고스톱을 치는 것이다.
고스톱 실력이 제일 뛰어난 사람은 단연 주동자인 그 아주머니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고스톱이라는 세계를 알았다. 어릴 때 형제들과 카키색 군용 담요를 펴 놓고 민화투를 치거나 혼자서 가로로 열두 장, 세로로 넉 장, 월별로 짝을 맞추는 놀이를 심심풀이 삼은 이후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 쥐어 보는 화투장이었다.
당연히 화투 실력은 거의 매번 꼴찌였고 살림 솜씨도 제일 어설펐다. 열 집 중 대졸 학력자도 나뿐이었다.
점 당 10원으로 진 사람이 내놓는 판돈은 무조건 지정된 빈 분유 깡통으로 들어갔다. 며칠 새 동전들이 꽤 묵직하게 쌓였다.
시간은 금세 지나가 어느덧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들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판을 접었다.
모인 돈으로 아이들과 모두 한자리에 모여 짜장면 파티를 벌이기도 했다.
다행히 바로 옆집 이웃이 나이라든지 성향, 아이들 학령 등이 비슷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두 집 아파트 현관문은 거의 늘 열려 있었다. 우리 집 두 딸과 옆집 아들 딸들은 내복 바람으로 마음 편하게 두 집을 오고 갔다.
같은 유치원을 다니며 밥도 얻어 먹고 장난감이나 책도 공유했다. 생일날이라도 되면 같은 계단에 사는 또래 아이들을 불러 옹기종기 모여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모두의 눈길은 케이크의 촛불에 향한 채 손뼉 치며 생일 축하 노래도 불렀다.
우습게도 대학 시절 어느 방학 한 기간 동안 딩동거리며 바이엘 상권으로 피아노 공부를 접은 내가 옆집 딸의 피아노 레슨을 했고 옆집 아주머니는 국어 교육과를 졸업한 나를 엄마로 둔 우리 딸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품앗이 아마추어 과외였다. 아이들은 방긋방긋 웃으며 교재 책을 들고 두 집을 오갔다.
1주일에 한 번 날을 정해 5층 꼭대기서부터 물을 쏟아 부으면 왁자지껄 계단 청소가 시작되었다. 각자 층별 순서대로 기다리다 자기 집 앞 계단 물청소를 끝내고 마당 앞까지 말끔히 물처리가 끝나면 또다시 어느 집에선가 커피타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보니 요즘처럼 독박 육아 우울증이나 주부 우울증 같은 것이 흔하지 않았던 듯하다. 모여서 온갖 동네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몰랐던 생활의 지혜도 배우고 뜨개질도 하고 날 잡아 같이 몰려 남대문 아동복 센터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윗집 아랫집 가족들 현황뿐 아니라 그야말로 숟가락 숫자도 알 정도가 되니 층간소음이란 낱말 자체가 없었다. 위층에서 소리가 나면 그냥 아는 얼굴들이 떠오를 뿐이었다.
김장 때면 당연히 서로 손을 빌리고 김장 김치가 익어갈 때쯤이면 한 집에 모여 앉아 만두를 빚고 똑같은 개수로 나누어 각자 쟁반에 담아 들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겨울이 끝나고 봄기운이 시작되면 또 서로 묵은 김치 단지를 비우느라 김치들이 오고갔다. 사철 보관이 가능한 김치 냉장고가 생긴 이후로는 사라진 풍경이다.
좋은 점도 있었지만 피곤한 점도 많았다. 시간을 뺏기는 게 좀 힘들었다. 그러잖아도 새침하다고 찍히기 쉬운데 한 번 엮인 모임에서 부드럽게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암중모색 중이던 나의 탈출은 엉뚱한 데서 이루어졌다.
일간 신문의 구직난을 매일 살피다 어느 날 눈에 딱 들어온 구인 광고 하나. 저축추진중앙위원회 부녀사원 모집.
지금으로 보면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간단한 필기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거친 후 마음 졸이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이화여대를 갓 졸업한 어린 여자 직원 두 명과 이제 막 서른으로 접어드는 나, 이렇게 세 명이 신입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소공동 금융가로 주 6일 근무의 출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