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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pr 16. 2022

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8

  30여 년 역사를 담은 추억

 항상 늘 보고 싶은 베로니카 씨 ᆢ.

 형제님께서는 잘 견디며 잘 계시지요?

 과부의 기도는 잘 들어주신다는데 성주간에 간곡히 기도 올리고 기쁜 부활 맞이하고픈 제 간절한 바람이 하느님께 닿기를 빌어 봅니다.    

 잘 견뎌내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을 닷새 앞두고 있는 2022년 4월 12일 화요일.

 교회는 사순 제5주간, 성주간을 보내고 있다.


 저녁 설거지를 막 끝낸 초저녁 시간.

 핸드폰 속으로 나를 찾아 날아온 카톡글 한 편.

 도미질라 형님이 보내신 글이다.

 눈시울이 화끈 붉어오며 목구멍 저 밑으로부터 뜨거운 어떤 것이 치밀어 오른다. 굳이 이름 붙인다면 서러움이라고나 할 수 있을는지.


 4월 8일 지난주 금요일 오후, 남편은 4박 5일의 면역치료 3차 항암주사 일정을 마쳤다. 한없이 소진되어 온몸 가득 불안과 두려움을 담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 그 순간부터 무조건적인 휴식과 영양 섭취에 매진하고 있는 들이다. 항암 치료 후 1주일간은 오로지 세 끼 식사와 두 끼 간식, 먹는 일과 휴식에 집중해야 한다. 환자 본인은 물론 보호자 역을 맡은 옆사람도 정신 바짝 차려 힘을 내야 한다.


 나름 내색하지 않으려 참고 참는다지만 한없이 가라앉으며 힘들어하는 남편. 겉으로는 평온을 유지하며 잔뜩 긴장하여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했던 오늘 하루가 지나간다. 그 고단함이 한 통의 따뜻한 카톡글 앞에서 맥없이 녹아내린다.

 책상 앞에 앉아 모든 생각들을 다 내려놓고 밀려오는 감정에 그대로 나를 맡기며 한참 동안 카톡글만을 바라본다.

 형님의 따뜻하고 소박한 사랑이 짧은 글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보다 두 살 많으신 도미질라 형님. 스스로 과부라고 칭하는 형님과 나와의 인연은 30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1988년 2월부터 1996년 2월까지 8년을 살았던 강서구 내발산동의 단독주택.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큰애와 초등학교 입학을 눈앞에 두고 있는 둘째를 위해 나름 강서구 안에서는 학교가 많이 모여 있고 학군이 괜찮다는 내발산동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6년 전 큰길 건너편에 있는 화곡 주공 제2아파트에서 2년 반을 살았던 터라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다.

 혼자 집을 보러 다니다 내 눈에 쏙 들어온 2층짜리 슬라브 단독주택. 조금은 허술했지만 대로변에서 한 블록 들어간 이면도로의 코너에 위치한 집이었다. 대지는 채 50평이 못 되는 48.5평. 말일성도교회 신자였던 집주인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고 내놓은 집이었다. 남편의 동의를 얻어 매매가 이루어졌다.


 나름 코너 집이라 상가를 염두에 두고 지었던 모양이다. 길가에 면한 아래층은 두 칸으로 나뉘어 철제 셔터가 굳게 내려져 있었고 그 안은 전세 살림집으로 쓰고 있었다.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셔터문을 올려 보니 넓은 통유리 쇼윈도와 미닫이 샷슈 도어가 나타났다.

 그것을 보는 순간 한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미질라 형님이다.


 1986년 10월, 가톨릭 세례를 받고 바로 가입한 헌화회라는 봉사 단체에서 형님을 만났다. 성당 신축을 진행 중인 때라 우리는 여러 가지 활동을 열심히 했다.

 일을 계획하거나 일이 끝난 후 수시로 이집저집을 드나들며 이마를 맞대고 다 같이 집밥을 먹곤 했다. 개화동 어느 단독주택의 셋방에 살던 도미질라 형님 댁에도 여러 번 드나들었다.


 1987년 여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형님의 남편이 사고를 당하셨다. 여름방학을 맞아 내려간 고향에서 친지 가족들과 물놀이를 즐기던 중 급류에 휘말려든 조카를 구해내고 정작 본인은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 특히 선하고 성실했던 배우자를 하루아침잃은 형님은 비탄과 우울, 절망의 늪에 빠졌다.


 30대 초반이었던 형님.

 딸과 아들, 어린 두 아이들을 앞에 두고 할 말을 잊었다. 두 팔을 무릎 앞으로 돌려 깍지 낀 채 웅크린 자세로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 앞에서 우리들도 말없이 앉아만 있다 돌아오곤 했다.

 얼마 후 들려온 소식으로는 한복집을 하고 있는 시누이 집 근처로 한복 짓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사를 갔다고 했다. 돈암동이라고 했다.


 도미질라 형님이 이곳에서 한복집을 하면 딱이겠다. 수소문하여 연락이 닿았다.

 형님은 돌아가신 남편의 절친이라는 남자들 다섯 분과 함께 집을 보러 오셨다. 현장답사를 나온 것이다. 결론은 오케이.


 전부터 세 들어 있던 분이 집을 비우고 영업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네온사인 간판을 달고 한복감이 전시될 유리 장식장이 들어오고 쇼윈도가 꾸며졌다.

 1980년도 후반기인 그 당시에는 한복집이 성업 중이었다. 솜씨 좋고 수더분하게 손님을 잘 다루는 형님네 한복집도 바로 자리를 잡았다. 주문 물량이 많아 도우미를 쓰기도 했고 꼭 솜씨가 필요한 저고리만 본인이 만들고 두루마기나 치마는 큰 시장 한복집 일손을 빌리기도 했다.

 밤새 미싱 앞에서 온갖 화려한 색깔의 한복들을 척척 많이도 지어 내었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나도 예쁜 한복을 잘 입었다.


 한복집은 바로 동네 사람들의 참새 방앗간이 되었고 1988년 여름에 태어난 우리 아들의 어린이집이 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딸들이 학교에 가고 막내가 잠깐 낮잠을 자는 사이 나는 잽싸게 바로 집 앞에 있는 시장을 보러 나섰다. 미처 내가 돌아오기도 전 잠에서 깬 우리 막내의 으앙으앙 울음소리, 층간소음이 들리면 형님이 한달음에 후다닥 2층에서 데려와 한복집에서 보살펴 주셨다. 바닥 가득 널어져 있는 일감들을 조금도 헤적질하지 않는 얌전한 아기라고 칭찬해 주시고 당신의 애인이라며 우리 아들 사진을 장식장 앞에 세워놓고 수시로 뽀뽀를 하곤 하셨다.


 세상 물정 모르고 담이 큰 내가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2층 우리 집 리모델링 공사가 한 달 가까이 진행되어 부엌을 쓸 수 없게 되었을 때는 매일 아침 우리 두 딸의 학교 도시락을 정성껏 싸 주시기도 했다.


 1996년 2월, 8년 만에 우리는 그 집을 떠났지만 형님은 2022년인 올해도 아직 그 가게를 지키고 계신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딸 아들 대학 교육 뒷바라지를 마치시고 가게에서 100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의 단독주택도 한 채 구입하셨다.


 한복집 영업은 이제 사양길로 들어선 지 오래다. 아들 딸이 모두 독립하고 혼자 생활하시는 지금은 그 공간을 그냥 사람들 만나는 장소 정도로 활용한다고 한다. 여름이면 인견으로 잠옷을 만들어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 딸의 권유로 계속 그 공간을 살려두기로 했다고 한다.


 작년에 단독주택을 정리하고 근처 25평형 아파트로 옮긴 후 주택 모기지론으로 돌리셨다.

 그 당시 절친하게 지냈던 다른 두 형님들과 더불어 4 총사를 이룬 우리들은 코로나의 위협 속에서도 새로 이사한 아파트 집들이 행사를 가졌다. 올해 초에도 한 차례 더 그 집에서 음식을 나누었다. 만날 때마다 장갑이니 모자니 작은 선물들을 준비해 나누신다.


 3년 전 내가 함안에 머물고 있을 때, 형님은 네 시간 반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시외버스를 타고 오셔서 1박 2일을 지내셨다.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보고 붉어오는 눈시울을 적시며 제일 먼저 하신 말씀

 "베로니카, 왜 이리 깊은 골짜기로 왔어?"

바로 다음날 떠나는 버스에 오르기 직전 활짝들 웃으시며 하신 말씀.

 "여기서 한 한 달쯤 살았으면 좋겠다."


 쑥떡과 시골 텃밭 야채와 신선한 자연을 즐기며 하룻밤을 한 방에서 같이 자며 웃고 얘기 나눴던 할매 4 총사.


 마음을 추스르고 답글을 넣는다.


 네에~~

 그럭저럭 열심히 조금은 평화롭게 힘든 투병 기간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


 30년 전의 활기찼던 시간들.

 3년 전의 다정했던 시간들.

 이제는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그  시간들이 새삼 더 진하게 그리워진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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