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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pr 23. 2022

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9

   주는 사람, The Giver.

 "형님, 지금 어디세요?"

 "응, 안나. 나 도서관 뒤뜰이야."

 "언제 집에 오세요?"

 "6시 반쯤 갈 거야."

 "오시면 전화 주세요. 오늘 쑥 인절미를 맞췄거든요."


 8층과 13층 사이의 반가운 층간소음은 이렇게 전화로 또는 카톡으로 전해진다.


 "저녁 드셨나요?"

 "선배님은 어떠세요?"

 "운동 가실래요?"


 작년 2월, 남편의 발병을 알게 된 그날부터 안나는 매일 밤 나를 불러내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한두 시간씩 한강 바람을 쐬는 밤 산책을 함께했다. 온갖 걱정과 근심을 나누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건네받았다.


 병원 진료를 다녀오는 날은 물론이고 수시로 우리 부부의 식사를 마음 써서 챙겨 다.

 뜨끈뜨끈 갓 끓여낸 쑥국, 배춧국, 청국장, 전복죽. 아삭아삭 싱그러운 배추 물김치, 오이 소박이. 노릇노릇 고소한 고등어구이까지 다양한 먹거리를 많이도 가져왔다.


 충격에 빠져 있는 나에게 남편과 같은 종류의 암을 극복하고 완치되어 잘 살고 있는 지인을 전화 통화로 연결해 주기도 했다. 남편과 같은 병원의 같은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은 사람이었다.

 동병상련, 먼저 겪은 사람의 걱정하지 말고 쾌유를 믿으라는 위로의 말은 다른 어떤 사람의 말보다 안심의 근거가 되고 희망의 씨앗이 되었다.


 10여 년 전 어느 봄날, 성당 반모임을 마친 반원 교우들이 다 같이 집 뒤 공원을 산책하는 길에서 안나 씨를 만났다. 같이 가던 교우가 안나 씨를 소개해 주었다. 얼마 전  옆 단지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동행하게 된 안나 씨와는 바로 그 첫 만남부터 친해졌다. 나보다 여섯 살 어린 안나 씨는 나를 엄청 챙겨 주었고 나는 안나 씨의 귀한 성품을 높이 샀다. 배려와 헌신의 이타적인 행위가 자동적으로 배어 나오는 사람이었다.


 문과 성향이 강한 나와는 달리 안나 씨는 이과 성향이 강했고 진취적이며 공간 지각 능력도 뛰어났다. 그러한 특성과 무한 긍정 마인드로 부동산 쪽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그쪽에 소극적이라 안나 씨가 수시로 들려주는 많은 정보들을 소 귀에 경 읽기 식으로 흘려보내었다. 정보를 분석하여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러 절차를 밟는 일들에 쏟아야 할 에너지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산책이나 나들이 후 안나 씨가 종종 들르는 단골 부동산에도 여러 번 같이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정보들을 전해 듣기도 했지만 한 발 떨어진 뒷전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어느 한순간 안나 씨가 강권하는 정보에 귀가 솔깃해지며 마음이 동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2017년 봄, 안나 씨가 말했다.

 "형님, 우리 아파트 단지에 집 하나 사세요. 내가 꼭 사고 싶었던 집인데 그때는 매물로 나오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지금 이 집을 샀어요. 그런데 그 집이 매물로 나왔대요."

 "그래?"

 그때 나는 다른 곳에 내 집을 두고 아들의 학교가 바로 코 앞에 있는 이곳에서 10년 가까이 전세를 살고 있는 중이었다.

 몇 번 집을 옮기고 싶었지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아파트값이 하락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고 남편도 그쪽에 손을 드는 한 사람이었다.

 좀 망설여졌지만 안나 씨는 강하게 추천했다. 일단 한번 알아나 보기로 하고 둘이서 이마를 맞대었다.


 안나 씨의 활약으로 며칠 후 그 집주인 아저씨와 연락이 닿았다. 활달하신 그분은 바로 당신 집에서 만날 것을 제의해 왔다.

 안나 씨와 나는 시간에 맞춰 그 집으로 갔다. 매물로 내놓은 집이 아니라 근처 다른 단지의 평수가 넓은 아파트였다.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리모델링되어 있었다.


 큰 목소리로 소탈하게 우리를 맞으신 그분은 직접 과일과 견과류를 갖춘 접대용 찻상까지 내오셨다. 유치원 원장이신 아내분은 오늘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대강 매매 금액과 날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또 하나의 인연이 밝혀졌다. 안나 씨의 남편과 그분이 같은 대학 같은 과의 선후배 관계였다.


 매매 계약서를 쓰기로 약속한 날짜에 맞추어 안나 씨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다시 그 댁으로 갔다. 아내분도 함께 반겨 주었다. 우리 부부와 비슷한 연배였다.

 아내분은 정말 그 집을 팔고 싶지 않았는데 아들이 있는 캐나다에 가 있는 동안 남편이 좀 더 넓은 아파트를 구해 리모델링까지 마치고 이사를 감행해 버렸다고 했다. 처음 입주해서부터 20여 년을 계속 그 집에서 살면서 아들 둘과 딸을 다 키우고 살림을 늘리며 정이 흠뻑 든 집이라 당신 혼자서라도 그 집을 떠나지 않고 계속 살고 싶었다고까지 말했다.

 자기 사업을 경영 중인 남편분은 "잘못하면 세금 폭탄 맞는다."는 한마디로 아내의 그 아쉬워하는 마음을 일축해 버렸다.


 매매 계약서 작성을 끝내고는 바로 술판이 벌어졌다.

 풍성한 안주를 곁들인 양주로 세 남자들의 술잔이 계속 채워졌다. 밤 깊도록 술과 이야기가 이어졌다.

 세 부부의 세상 살아온 이야기가 재밌게 펼쳐졌다. 구수하게 말하기를 엄청 즐기는 분이라 우리들은 주로 듣는 쪽이 되었다.

 학교 폭력 때문에 중학생이었던 둘째 아들을 캐나다로 유학 보내게 된 사연, 사업과 부부 이야기 등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듣는 우리들은 별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웃고 경탄하며 시간이 흘러갔다.

 계속 더 놀다 가라고 붙잡는 권유를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잔금을 치르고 매매가 완료된 날은 그분이 동네 맛집에서 또 저녁을 샀다.

 여섯 명이 함께 모여 저녁을 먹고 축하주를 마셨다. 깔끔하게 매매가 성사되고 부동산 중개비도 절약된 재밌는 매매였다.


 그 이후 3,4년 간 집값은 정신없이 뛰었다.


 주일 아침이 되면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카톡을 넣는다.

 "10시 20분, 아파트 현관."

 바로 답이 온다.

 "ㅇㅋ~~"

 

11시 미사 봉헌을 위해 산뜻하게 차려입은 매무새를 서로 예쁘다고 추켜 세우며 성당으로 향한다.

 오래된 빌라 단지 정원의 흐드러진 꽃들과 단독주택 담 넘어 예쁜 자태를 뽐내는 생기 넘치는 꽃과 나무들을 감상하며 도보 20분의 거리를 오손도손 걷는다.

 왕복하면 이미 5천 보를 넘는다. 고마운 인연과 함께하는 힐링 공간이다.


 글을 마무리짓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안나 씨다.

 "형님, 오늘 남편이랑 아차산 등산 왔는데 망우리를 지나 면목동 동원 시장 쪽으로 빠졌어요.

 유명하다는 만두집이 있어서 찾아 왔는데 형님 몫도 좀 사 갈까 해요."

 "남편이 만두 잘 안 먹는데 ᆢ."

 "그럼 형님 잡수세요."

 "그래, 고마워. 내일 큰애랑 아들네 세 식구가 온다는데 그때 간식으로 내놔야겠다. 고마워."

 "네에, 그럼 고기 만두 1팩, 김치 만두 1팩 포장해 갈게요."

 "응, 고마워~~."


 2022년 봄이 지나가고 있다.



2022년 4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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