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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06. 2022

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10

   20대 후반, 주부 초년생

 Youtube를 통해 소설을 읽는(듣는) 것이 요즘의 큰 즐거움이다. 말똥말똥 잠이 달아나 버린 신새벽에 좋은 친구가 된다. 집안일을 할 때는 무선 이어폰으로 듣는다. 

 인간 심리도 읽어내고 공감 능력도 계발하고 상상의 폭도 넓힌다. 재밌다.


 오늘은 이동하 작가의 <홍소 哄笑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를 들었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아파트 생활. 주거 문화의 대변혁. 잠실 17평형 아파트 단지에 신축 입주한 주민들의 모습을 직접 체험하고 쓴 소설이라고 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옆집 윗집 아랫집 모든 이웃들의 소비 생활이 서로 비교 경쟁 대상이 된다. 집집마다 새 장난감, 새 가구, 새 가전제품들을 사 들이느라 한바탕 회오리를 겪는다. 급기야 귀에 구멍을 뚫고 반짝이는 귀걸이를 달랑거리는 탈바꿈 끝에 아이들과 남편을 팽개치고 가출을 하는 아내들의 일탈까지 생겨난다. 이웃한 두 가정이 동시에 파국을 맞으면서 소설은 끝난다.


 소설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이 에 선하게 그려지며 1981년 8월부터 1983년 11월까지 2년 남짓 살았던 13평형 주공 아파트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 지 3년, 결혼한 지 4년 만에 마련한 우리들의 첫 집이었다.

 매매 가격은 540만 원 정도로 기억된다. 5층 꼭대기 맨 가장자리 집이었다. 그해 4월에 태어난 우리 둘째가 겨우 백일을 지났을 때이다.


 그 당시만 해도 새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어른이 먼저 그 집 문턱을 넘어야 한다는 어른 섬김 풍습이 강했던지라 시어머님이 상경해 계셨다. 군 입대 중이었던 시동생도 휴가차 와 있었다.


 이사 전에 집이 비게 되어 용감하게 셀프 도배에 도전했다. 군인 아저씨 시동생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방 두 개와 자그마한 거실 그리고 반 입식 부엌이 있었다.

 가로 세로 복잡한 무늬를 맞출 실력이 없으니 민무늬 벽지를 택했다. 길이에 맞게 재단하여 자르고 밀가루로 쑨 풀을 발랐다. 끝을 마주 잡아 들고 위에서 아래로 잘 맞춘 다음 빗자루로 눌러 가며 쓸어내리면 완성이다. 천정은 들어 올린 벽지가 풀을 먹은 무게로 축축 늘어지는 통에 조금 더 어려웠다.

 좁지만 세 칸의 공간을 다 도배하고 부엌은 하얀색 수성 페인트를 칠했다. 막대가 긴 롤러를 페인트 통에 담가 적셔 가며 벽과 천장을 구석구석 빈틈없이 칠하는 작업이었다. 맨 바깥쪽 집이라 겨울철에는 결로현상 때문에 부엌 벽이 시커메졌다. 해마다 봄이면 날 잡아 부엌 벽을 새로 칠했다.


 내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모유 수유하던 때라 시어머님께 맡겨 놓은 4개월짜리 둘째 걱정에 마음이 급했다. 시간이 지나자 불어 오른 젖이 상의 남방 밖으로 베어 나와 옷을 적셨다. 수건으로 눌러 닦아 가며 도배와 칠을 끝내고 버스로 20분 거리의 집으로 바삐 돌아왔다. 집에 오기 바쁘게 아기를 돌보고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추어 저녁상을 차렸다.


 그때는 포장 이사라는 것이 없었다. 당사자들이 이삿짐을 다 꾸려야 했다. 주 6일 근무의 남편들은 직장에 몸 바친 때라 거의 주부들 전담 일이었다.

 이사가 결정되면 동네 가게에서 빈 박스를 구해 오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꽤 스트레스받는 일이다. 며칠 걸려 짬짬이 박스를 구해와 옷을 담고 장난감과 책들을 담았다. 빨간 비닐 끈으로 꽁꽁 묶어 차곡차곡 거실 한쪽 구석에 쌓아 다. 그릇들은 하나하나 신문지로 돌돌 싸서 박스에 조심조심 담았다.


 이삿날, 장롱을 비롯한 살림살이 짐들이 트럭에 실렸다. 2층 연립주택에서 5층 아파트까지 모든 짐을 일꾼 아저씨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날랐다. 영차영차 좁은 계단의 모퉁이를 돌 때에는 긴 장롱이 벽에 부딪칠까 모두 긴장하여 "어, 어!" 비명을 내지르며 방향을 바로 잡아 주곤 했다. 요즘 아이들의 살림과는 비교도 안 되게 적은 짐이었기에 그나마 가능했던 일이지 싶다.


 부산한 가운데 이삿날이 저물고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50대 초반이셨던 시어머님은 아침 밥상 물린 후 하얀 고무신에 한복 곱게 차려 입고 아들과 나들이 다녀올 생각에 들떠 계단을 오르내리고 계셨다. 처음 보는 아래층 이웃 아주머니께 덕수궁 놀러 간다고 자랑하시는 어머님 목소리가 집까지 들려왔다. 사교성과 친화력 뛰어난 어머님의 의기양양 경상도 사투리 음성이다.

 이것저것 못도 치고 전기 코드도 정리하며 처리할 일이 많은 남편을 어머니 모시고 어서 나서라고 채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쉰네 살 어머니를 위한 서른한 살 장남 아들의 효도 관광이다.

 갓난쟁이와 세 살 터울 두 아이를 데리고 낯선 곳에서 하루 종일 남은 이삿짐 정리를 하는 일은 오로지 주부 초보생 혼자만의 몫이었다. 가족 모두의 저녁 식사 준비까지.


 13평짜리 5층 꼭대기 살림이었지만 두 아이를 키우며 열심히 살았다. 네 살짜리 큰애는 걸리고 한 살짜리 둘째는 한 손으로 안고 다른 한 손에는 접이식 엉성한 유모차를 든 채 5층 계단을 많이도 오르내렸다. 수박이라도 한 통 장 보아 오는 날은 완전 낑낑이었다.


 그곳에서의 층간소음은 3층 아주머니의 전교 활동이었다.

 일요일 아침, 띵똥 소리와 함께 같이 교회 가자는 큰 목소리가 현관문을 넘어 들려온다. 성악을 전공하셨다는 그분의 목소리는 울림이 크고 부드러웠다.


 "ㅇㅇ엄마, 교회 가! 나 계단에서 기다릴게."


 평소에 김치거리라도 사서 들고 오는 것을 보게 되면 대신 들어주고 고맙게 집까지 따라와 같이 다듬어 주고 도와주면서 교회 예배 참석을 권해 왔다.

 꾸준하면서도 열성적인 권유에 두어 번 같이 교회를 찾았다. 목사님의 교우들 가정 방 모임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왠지 끌리지 않았다. 올백으로 기름 바른 머리에 빛나는 백구두를 신은 목사님의 청산유수 설교 말씀이 내 마음 밖으로 겉돌기만 했다. 아주머니께는 미안했지만 서너 번의 예배 참석만으로 개신교 신앙생활은 끝을 맺었다.

 아주머니도 더 이상 강권하지 않으셨다. 그냥 친절하고 상냥한 이웃으로 잘 지냈다. 건설회사 중동 건설 현장에 근무하시던 남편분이 귀국하시자 강남의 좋은 아파트를 분양받아 떠나셨다.

 연년생 아들 둘을 키우고 둘째는 우리 둘째와 동갑인 바로 앞집과는 낮에는 거의 활짝 현관문을 마주 열어놓고 지냈다. 우리 집 바로 아래 4층과 3층 전교 아주머니 이렇게 네 집이 터놓고 잘 지냈다.


 81년 생 둘째가 제법 잘 걸어 다니던 1983년 9월 1일. 밖에서 데리고 놀고 있던 놀이터에 갑자기 엄청난 소음이 터졌다. 하늘과 땅의 층을 온통 뒤흔드는 소음.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대기를 갈랐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텅 빈 채 그저 무심하니 높고 파랬다. 밝게 내리쬐는 햇살에 날씨는 무척 맑았다.

 곧이어 확성기로 들려오는 아나운서의 긴박한 목소리.


 "실제 상황입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국민들은 속히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십시오."


 안전한 곳이 어디란 말인가?


 잠시 후에 이 일은  KAL 여객기 격추 사건으로 밝혀졌다. 항공 궤도를 벗어난 대한항공 여객기가 사할린 주변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한 것이다.


 공포를 몰고 오는 공습경보 소음 앞에서 속수무책 막막한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우연히 내려다  눈에 들어온 둘째의 작은 발. 아가의 조그만 발을 감싸고 있는 노란색 낡은 운동화가 유난히 짠했다. 후회스러웠다.

 다음날 바로 신발 가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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