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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15. 2022

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11

   선생님의 슬픈 사랑 이야기

 층간소음이라는 소재로 글을 쓰다 보니 한 편 두 편, 그동안 살아왔던 집들이 주욱 기억나며 10편까지 이어졌다. 몇 편까지 더 이어질지 모르지만 태어나서 17년 간 살았던 내 유년의 집을 맨 마지막으로 남겨 대미를 장식하고 싶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인 오늘 그 계획을 바꾸었다. 그 집에서 일어났던 소음의 주인공이 바로 선생님이시기 때문이다.


 딱 한마디, 마당 넓은 집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던 그 집. 부산시 부산진구 가야동 403번지. 수량 풍부하고 물맛 좋은 커다란 우물이 있었고 방  칸과 대청마루, 부엌이 있었던 정남향 함석지붕 집.

 대문간에서 마당으로 가는 좁은 통로 양 옆으로 일렬로 쭈욱 늘어선 블로크 벽돌 안에서는 알록달록 채송화가 보글거리고 블로크 벽돌 바로 뒤로는 엄마가 좋아하시는 꽃들이 철 따라 다른 모습으로 피어났다. 황매화, 금잔화, 봉숭아, 분꽃, 붓꽃, 국화 ᆢ. 그 안쪽으로는 잘 손질된 텃밭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길은 꽤나 곤혹스러웠다. 길게만 느껴지던 그 길을 땅 밖으로 기어 나온 지렁이들이 구불구불 자기들 세상을 만난 듯 떼를 지어 기어다녔다. 징그러운 지렁이들을 피해 발 딛을 곳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봄이 되면 담 밑에 핀 앵두나무 분홍빛 꽃 색깔이 참으로 고왔다. 깨어진 유리 조각들 중 제법 넓은 네모진 것이라도 줍게 되면 땅을 파고 그 속에 예쁜 초록 나뭇잎들을 깔고 연분홍 앵두꽃을 올리고는 유리판을 덮었다.

 볼 넓은 고무신 한 짝을 벗어 들고 깨금발을 뛰면서 하얀 대파 꽃 주위를 웅웅거리는 벌을 향해 빙빙 돌렸다. 어렵사리 잡은 벌 두세 마리를 유리판 밑으로 잽싸게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극장이라고 불렀다. 투명한 유리판을 통해 땅 밑의 꽃을 보고 나뭇잎을 보고 비비적거리며 좁고 어두운 공간 안에서 여기저기 짧게 날아 다니는 벌들을 관람했다. 영화구경. 심심해지면 유리 위에 흙을 덮어 감춰두고 나중에 다시 찾아가 덮인 흙을 헤치고 내려다보곤 했던 우리들만의 극장.


 내 기억 속 가장 평화로운 마음의 고향은 어릴 때 자라던 그 고향집의 넓은 마당이다. 쓰윽쓰윽 완만한 포물선을 그은 빗질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던 깨끗한 마당.

 열 명 안팎의 대식구가 북적대며 서너 명이 한 방에서 한 이불 덮고 자던 시절. 눈 비비고 일어나면 사방이 탁 트인 우물가에서 러닝 바람으로 이빨 닦고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다.

 아랫채에 세 들어 사는 아저씨 아주머니와 그 집 아들 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물가가 공용 샤워실이었다. 

겨울 한 철은 불기운이 남아 있는 부엌 아궁이 앞이 대신했다.

 집 한 귀퉁이, 커다란 느릅나무 바로 옆에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는 푸세식 화장실도 같이 썼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지만 그때는 거의 모든 일상이 땅 위의 흙을 밟으며 이루어졌다.

 성격이 활달한 다른 가족들은 거의 대부분 제각각 바쁜 일들로 집을 비웠다. 나 혼자 차지한 햇살 가득한 마당의 꽃밭에서 하나하나 그 꽃들을 눈여겨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의 소중한 보물이다.

 샛노랬던 호박꽃까지.


 이제 돌아보니 내게 있어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한가로이 흙 밟고 서서 앞산의 구름이나 마당의 꽃밭을 구경하는 자유로움에서 멀어져 사람을 챙기고 먹이고 입히고 거두는 일로 항상 동동거리는 분주함에 파묻히는 것이었다.

 온갖 의무에 예속되는 삶이었다.

 그것은 대부분 땅을 떠난 허공의 시멘트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 흙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와 충전이 없는 곳. 메마른 심성과 부족한 능력으로 많은 과오를 남겼다.


 그 집은 또 요술방망이였다. 어느 때부터인가 갖가지 채소들이 자라던 텃밭이 뚝딱뚝딱 살림집들과 방들로 바뀌었다. 우리들이 자라고 돈 쓸 일이 많아지자 대문간 옆 텃밭 한 부분이 시멘트 담으로 가려졌다. 어머니가 땅을 뚝 떼어서 파신 것이다. 마당은 없이 집만 그득한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쓰윽 들어서고 감나무와 돌배나무, 딸기밭은 사라졌다.

 다음으로 변신한 곳은 그 집과 이어지는 마당 안쪽의 텃밭이었다. 담벼락 한 귀퉁이에 블로크 벽돌과 목재 더미가 쌓였다. 긴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사각형 체를 통해 싸락싸락 걸러진 모래와 시멘트가 물에 섞이며 일꾼들이 며칠 바삐 움직였다. 방 두 칸과 양 옆에 작은 부엌과 좁은 마루가 딸린 일자형 집이 들어섰다. 아랫채가 탄생한 것이다. 그 집의 첫 입주자가 선생님이시다. 나의 국민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 그해 막 교대를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 우리 반을 맡으신 총각 선생님.


 거창이 고향인 선생님은 학교 앞 조그마한 방에서 자취를 하고 계셨다. 어느 날 선생님이 결근을 하셨다. 결근이 며칠 이어졌다. 오지랖 넓으신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선생님 댁을 찾아가셨다. 큰오빠보다 나이가 어린 총각 선생님이 홀로 앓고 계신 것을 보고 어머니는 죽을 끓여 나르셨다. 노르스름 식감 좋은 녹두죽. 나도 몇 번 보자기에 싼 죽 심부름을 하였다. 며칠 후 선생님은 출근하셨고 장티푸스를 앓으셨다고 했다.


 형제 서열 다섯째로 나이 어린 나는 집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날 우리 집 아랫채로 선생님이 이사를 오셨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남동생을 불러오고 다음 해에는 농사 지으시던 두 분 부모님도 모셔 와 네 가족이 함께 생활하셨다.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은 그해뿐만 아니라 5학년, 6학년까지 이어져 3년 동안 같은 담임과 학생이 되었다. 중학교도 입시로 진학하던 시절. 한 명이라도 더 명문 중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에 선생님들의 명예가 걸려 있었다. 선생님들은 입시 지도에 바짝 열을 올리셨다.


 성적순으로 열 명이 선발되어 매일 밤 선생님 댁에서 과외를 했다. 7시쯤 모여 9시경 끝났을 것이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쪼르륵 마당을 건너 쏘옥 내 방으로 들어다. 아이들은 추위에 몸을 옹송거리며 꽤 먼 거리를 걸어서 귀가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함께 오손도손 밤길을 걸어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섭섭했다. 삼삼오오 짝지어 대문을 나서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부러웠다.


 선생님은 열정이 있으셨고 짙은 눈썹 아래 쌍꺼풀진 눈이 서글서글 빛나는 미남이셨다. 그리고 젊으셨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시는 예쁜 여선생님을 사랑하셨다. 음악이 주요 과목인 예쁘장한 여선생님이셨다.

 내가 사랑의 파발꾼이 되었다. 선생님의 연애편지 배달꾼이 된 것이다. 꼬마 우체부가 되어 어렵기만 한 교무실을 기웃거리며 퇴근하시는 선생님을 기다렸다. 선생님이 은근히 내 손에 쥐어 주신 따끈따끈한 연서를 그 주인에게 전해드리곤 했다.


 애석하게도 그 사랑이 달콤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쓰디쓴 결말로 끝났다. 그 여선생님이 부자 청년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때부터였다. 우물가에 바로 붙어 있는 선생님 방 창문으로부터 낯선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도 자주자주. 아주 큰 소리였고 애절한 음률이었다. 레코드판이 돌아가고 선생님 댁 전축에서 낯선 외국 남자 가수 목소리가 들리고 선생님의 높은 목소리도 함께 섞여 들렸다.


 오오 달콤한 입수울, 못 잊어 우운다~~.


 연이어 주먹으로 얇은 블로커 벽을 쿵쿵 치는 소리. 꽤 여러 날 반복되었고 선생님의 주먹 쥔 손마디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공부하러 온 우리들 앞에서도 한동안 고뇌에 찬 목소리로 그 노래를 부르고 주먹으로 벽을 치셨다. 치명상을 입으신 것이다.

 LP판 껍질을 통해 알게 된 노래 제목은 푸치니의 오페라 <라 토스카> 중의 슬픈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


 파바로티의 청아한 테너 목소리로 이 곡을 듣게 될 때마다 아련히 오래된 추억과 함께 선생님의 반듯하어 넘긴 숱 많은 새까만 반곱슬 머리와 선 굵은 젊은 얼굴이 떠오른다.


 대학 입학 후 찾아뵌 자리에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난 네가 수학과를 갈 줄 알았는데 어떻게 국어과를 갔네?"

 나의 전공과목 선택은 국어를 전공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3년 간 알게 모르게 받은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졸업 후 긴 시간이 흘러 동창들이 마련한 졸업 30주년 기념식장에서 다시 만난 선생님. 40대에 들어선 우리들을 보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늙은 여자들하곤 안 놀아."  

 "너희들이 제자라서 만나 주는 거야."

 선생님은 여전히 미남이셨고 패기만만한 50대 청춘이셨다.

 과외수업 시작 전 두꺼운 백과사전을 펼쳐 놓고 우리들에게 스트레칭 동작들을 가르쳐 주셨던 멋쟁이 선생님.


 선생님도 이젠 80 전후의 할아버지가 되셨을 것이다.

 서울로 옮기면서 연락 뚝 끊어 버린 부실한 애제자가 오늘 스승의 날을 맞아 아련한 추억 한 편을 떠올리며 선생님께 감사를 전한다.


 선생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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