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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19. 2022

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12

   가슴에 묻은 자식

 알뜰살뜰 근검절약하셨던 담임선생님 가족은 단독주택을 마련하여 이사를 가셨다.

 새로 우리 학교로 전근 오신 다른 선생님 가족이 아랫채의 새 주인이 되셨다.

 40대 중반쯤 되셨던 선생님과 사모님은 두 분 다 과묵하시고 점잖으신 분들이셨다. 집에서 선생님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모님은 마당에 놓인 평상에서 어머니와 함께 야채를 다듬고 음식도 나누며 한 가족처럼 지냈다.


 꽤 크고 무거웠던 나무 평상은 시간 따라 이곳저곳 시원한 곳으로 옮겨가며 사용했다. 낮에는 그늘 짙은 느릅나무 아래로 해 진 후에는 마당 한가운데로 영차영차 두세 명이 마주 들고 옮겨 다녔다.


 한가한 오전 나절, 커다란 느릅나무 그늘 아래에서 앉은뱅이 밥상 책상을 펴놓고 혼자 책이라도 읽고 있을 때면 사모님도 평상으로 나오셨다. 일본에서 여학교를 다니셨다는 사모님은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일본 잡지인 文藝春秋를 즐겨 읽으셨다. 잡지 속에 있는 네 칸짜리 만화를 보여 주시며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도 하셨다. 말풍선 속에 적힌 일본어에 완전 까막눈인 내가 내 맘대로 그림을 보고 상상한 이야기를 지어 내면  같이 재밌어하시고 칭찬해 주시고 적혀 있는 일본어를 번역해 주셨다.

 괄괄하고 외향적이며 하루 종일 대가족 건사하기에 바쁘신 1917년생 우리 어머니에게선 기대할 수 없는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큼직한 토마토 하나를 손에 쥐어 주시며 혼자 살짝 먹으라고 속삭여 주시던 사모님. 따뜻하고 믿음직한 어른으로서 내 유년의 시간에 크게 자리 잡고 계신다.


 여상을 다니고 있던 사모님의 막내 여동생이 종종 언니 집엘 다니러 오면 그 언니는 내 방에서 같이 잤다.

 중1 때의 영어 교과서. Willy와 Shally.

 중학 진학이 결정되자 동네 친구 몇몇이 어울려 서면까지 사설 학원을 다녔다. 입학 전까지 겨우 알파벳 인쇄체 필기체 대문자 소문자 정도를 익혔을 뿐 사전에 적힌 발음 기호도 제대로 못 읽는 풋내기 중학교 신입생이었다.

 영어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들려 주시는 원어민 카세트 낭독 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 두렵고 황당했다.

 고등학생인 언니가 술술 읽어주는 영어 본문과 묻기만 하면 척척 가르쳐주는 단어 뜻들이 경이로웠다. 언니에게 물어서 그렇게 한 번 미리 듣고 간 영어 수업은 더 이상 무섭거나 긴장된 시간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 선생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때 처음으로 예습의 즐거움을 알았다. 단어만 미리 공부해 가도 만사형통이었다.


 시험 기간 동안 같이 공부하러 우리 집으로 온 동네 친구랑 같이 우리 옆에서 쿨쿨 자고 있는 언니 배꼽에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시험 준비 밤샘 공부를 위해 준비한 간식 과자를 일단 냠냠 짭짭 맛있게 잘 먹었다. 잠깐만 눈 붙이고 일어나 공부하겠다는 야무진 꿈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되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다.


 평소에 거의 한마디도 말씀이 없으시던 선생님은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동네 가수로 변신하셨다. 골목길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신다. 집으로 가까이 오실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빨간 마후라는 하늘의 사나이 ~~

 하늘의 사나이는 빨간 마~후~라~~


 깜짝 놀란 사모님이 급히 대문 쪽으로 향하신다.


 "쉬이 쉬이, 여보 여보."


 선생님을 다독이고 부축하면서 급히 방으로 모신다. 하지만 커다란 노랫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구두를 벗고 방으로 들어가시면서도 노래는 계속되고 창문을 넘어 마당으로 퍼져 나왔다.


 노오란 샤스 입으~ 말 없는 그 사내가~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어느 날 아랫채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거의 붙어 있는 윗집에서 불이 났다. 대낮에 발생한 꽤 큰 불이었다. 불길이 넘실거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웅성거렸다. 그 불길이 우리 집 아랫채를 향하고 있었다.

 사모님이 뭔가를 급하게 품에 안고 나오셨다.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우물물을 날라 불을 향해 퍼붓고 뒤늦게 출동한 119가 사이렌 소리 요란하게 온 동네를 들쑤시면서 불길은 잡히고 다행히 아랫채는 화마로부터 안전했다.

 모두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날 사모님이 품에 안고 나오신 것은 사진 액자였다.

 맑은 얼굴을 가진 20대 초반의 아리따운 처녀의 영정 사진이 담긴 액자.


 소통에 서투르고 내성적이고 학교 생활밖에 모르는 어린 나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날 밤 어둠 속에서 평상에 둘러앉은 어른들이 소곤거리는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 

 선생님과 사모님의 깊은 슬픔을 알게 되었다.

 따님을 화재로 잃으셨다는 것이다.

 여상을 졸업하고 취업한 부산시외전신전화국에서 일어난 화재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마음속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도 내색 없이 조용한 일상을 사셨던 사모님. 의젓하고 따뜻하셨던 그분을 다시 한번 만나 뵙고 싶다.

 이번에는 내가 말없이 사모님 옆에 앉아 있어 드리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그 당시 기사를 찾아보았다.


 1968년 3월 18일 상오 8시 7분

 검은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부산시외전신전화국 8층 건물 주변은 200여 명의 교환양들이 목메어 외치는 "사람 살려!"란 비명소리와 유리 창문을 부수고 뛰어내리는 모습 등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화재는 부산에선 최고층 건물에 처음 당하는 일로 화상자 아닌 추락 사상자만 41명을 기록했다.

 불이 일반 공무원의 출근 시간보다 약 1시간 먼저 일어났기 때문에 희생자가 적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이 건물 안엔 부산시외전신전화국 및 부산체신청 직원 등 모두 1천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

 교환양들은 평소부터 일반 직원들보다 1시간 앞당긴 8시가 출근 시간. 이래서 희생자의 대부분이 교환양들이었다. 75명의 교환양은 전날 밤 야근자들이고 130여 명은 이날 출근, 막 교대가 끝날 즈음 "불이야!" 하는 소리에 200여 교환양들은 일제히 교환실을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왔다. 9층 옥상에 50여 명, 이밖에 150여 명은 모두 5층에 그대로 갇혀 다른 출구를 찾았으나 모두 막혀 있었다.


 죽은 교환양 5명.


 복구대책본부는 5명의 순직 교환양들에 대한 장례식을 20일 상오 10시 부산시외전화국장으로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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