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얼굴을 가진 층간소음 13
아, 어머니♡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어머니는 확실한 나만의 공간, 독립된 내 방을 확보해 주셨다. 아랫채와 커다란 느릅나무 사이 조그만 터에 뚝딱뚝딱 방 하나를 지어 주셨다. 미닫이 쪽문을 열면 바로 앞에 신발 두 켤레 정도 놓일 수 있는 좁은 시멘트 축담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연탄아궁이가 있었다. 도르르 앞으로 끌어내어 다 타들어 간 연탄을 새 연탄으로 갈아 다시 안으로 밀어 넣는 아궁이였다. 손을 내밀면 윗집 담과 거의 맞닿는 쪼끄만 창문도 하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 드나드느라 방문 앞을 오고 가는 발자국 소리가 제일 큰 바깥 소음이었다.
누룩 나무라고 불렀던 우리 집 느릅나무는 동네에서 조금 유명했다. 종기가 나거나 상처에 염증이 생기면 이웃 사람들은 느릅나무 껍질을 얻으러 우리 집으로 왔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조금은 질긴 느릅나무 껍질 속살을 벗겨내어 콩콩 찧어서 환부에 붙이면 용케도 고름을 빨아내는 약효가 있었다.
아무나 들어와 필요한 만큼 벗겨 가라고 나무 옆에는 아예 낫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느릅나무 밑동 바로 위 한 부분은 짙은 노랑 주홍빛 속살이 어른 손바닥 두 개 정도의 넓이로 드러나 있었다.
그 느릅나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집으로 왔다. 젊었던 엄마가 유방섬유선종을 앓으셨을 때 약재로 쓰셨다고 한다. 열아홉 살 손위이신 큰오빠가 냇가에 있는 느릅나무를 발견하고 어머니 생각에 한 가지 꺾어 와 심은 것이다. 20년 넘게 우리 집에서 뿌리를 내려 넉넉한 가지들을 뻗어 왔다.
K장남이셨던 큰오빠의 살가운 마음과 책임감의 상징으로 마당 한 귀퉁이에 우뚝 자리 잡아 무성하게 잘 자랐다.
농촌 인구가 무차별 도시로 유입되던 1960년대. 밥벌이를 찾아 고향을 떠나온 넉넉지 않은 사람들이 비바람 피할 지붕 밑이 많이 필요했다. 골목길에 접하고 있던 돌담이 반쯤 허물어지고 또 다른 아랫채 한 채가 들어섰다. 어머니는 점포 딸린 집을 생각하셨던 것 같다. 넓은 마당 한 귀퉁이에 모래와 시멘트 포대가 부려지고 목재가 쌓이고 일꾼 아저씨들이 드나들었다. 곱게 체로 걸러낸 모래더미 한복판에 적당한 양의 시멘트 가루와 물이 부어지면 둘러 서 있던 두세 명 아저씨들이 쓱싹쓱싹 삽질로 걸죽한 시멘트 반죽을 만들어 내었다. 인간 레미콘이었던 셈이다. 한 쪽 옆에서는 귀에다 연필을 꽂은 목수 아저씨가 쓰윽쓱 대패질을 하고 계셨다. 대엿새가 지나면 방 두 칸에 그리 넓지 않은 시멘트 바닥 홀이 딸린 집이 한 채 뚝딱 지어졌다. 골목으로 향해 있는 출입구는 미닫이 유리문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네 명 가족이 들어와 고등학생인 조카까지 데리고 복닥복닥 살았다.
처음에는 엉성하게 짠 나무 진열대 위에 눈에 익은 상호의 과자 봉투 몇 개를 늘어놓고 가게 비슷한 꼴을 갖추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장사는 접었다. 대로변이 아닌 좁은 골목 안이니 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주머니는 여름 한 철 내내 콩국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우뭇가사리 해초를 푸욱 삶아 걸러 식혀서 묵 모양의 한천을 만들고 굵은 체 위에서 눌러 국수 모양의 투명한 건더기를 뽑아냈다. 콩을 삶아 차가운 물에 씻어내고 맷돌에 갈아 콩국으로 만드는 모든 작업들이 우리 집 우물가에서 이루어졌다.
짭조름하니 굵은 천일염으로 조금 세게 간을 한 콩국에다 가느다랗게 체 친 한천 건더기를 한 국자 떠 넣고 동동 차가운 얼음 띄운 고소한 콩국 대접이 종종 우리 집으로 넘어오기도 했다. 냉장고도 믹서기도 없었으니 보관도 제작도 고된 작업이었다.
그 무렵 30대 중반인 큰오빠는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셨다. 경찰 공무원으로 교통경찰 직무에 종사하고 계셨는데 주류 도매 유통업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되셨다.
1960년대 말, 작은 사업이라도 합법이나 정의보다는 소위 빽이 되는 넉넉한 자금과 든든한 인맥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사회적 분위기인데 별 준비도 없이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수익이 짭짤해 보이는 그 시장으로 눈을 돌리신 것이다.
배달 사원 두 명을 고용하여 가게를 여셨다.
투잡을 꿈꾸셨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이미 기득권을 획득한 큰손들의 그물망을 오빠는 뚫을 수 없었고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하여 큰 실수를 저질렀다.
체포되었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우리 집에 큰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뇌출혈로 쓰러져 7년간 자리보전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쯤 지난 시점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2학년 때 결혼하신 큰오빠에게는 이미 어린 남매가 두 명 있었고 채 서른 살이 안 되는 젊은 올케언니가 계셨다.
큰오빠는 7형제 중 어린 네 명의 동생들과 어머니를 포함해 아홉 식구의 실질적인 가장이셨다.
새 학기가 되어 작은오빠와 내가 학교에서 받아 온 중ㆍ고등학교 등록금 납부 고지서는 해를 바꿔 가며 일년 내내 큰오빠 신혼방의 장식장 여닫이 문 안쪽에 붙어 있었다.
큰오빠의 효성 못지않게 장남 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는 일편단심 큰오빠의 무죄방면을 위해 온갖 발품을 다 팔았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당분간 이 집에서 그대로 전세를 산다는 전제하에 통째로 이 집을 파셨다. 변호사를 사는 일부터 뭉텡이 돈이 들어갔다.
숨 가쁘게 몰아치는 풍파 속에서도 어머니는 꿋꿋하셨고 우리들은 안전지대에 머물렀다. 우리들의 학교 생활은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 지속되었다. 어머니가 집을 많이 비웠고 집안 공기는 무거웠지만 어린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대학 입시만이 강조되는 고등학교 학업에 집중했다. 어머니가 새벽 완행열차를 타고 고등법원이 있는 대구로 향하시는 일이 잦았다. 오빠 사건이 고등법원 관할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브로커들의 도움을 받아 담당 판사를 알아내고 자택을 알아내어 소위 뇌물을 갖다 바치는 작업을 하셨다. 집을 판 현금 뭉치를 허리에 차고 이른 새벽 대구행 열차를 타셨다. 오빠 면회도 다니셨다.
원고인 피해자의 집에 찾아가 합의를 얻어 내면 도움이 된다는 귀띔을 듣고 그 댁에도 여러 번 찾아가 선처를 바란다는 간청을 드렸다.
오빠는 풀려 나왔고 경찰옷을 벗었다. 주류 도매업을 계속하셨다. 올케언니는 어린 조카 한 명은 우리 집에 맡기고 상점 안쪽 공간에서 식당을 운영하셨다.
동네에서 관혼상제 일이 생기면 어느 누구보다 먼저 그 집으로 달려가 두 손 걷어붙이고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하는 어머니시다. 갈등 해결에 뛰어나셔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상대편의 말 다 듣고 중재와 화해로 결말을 내고는 두 손 툭툭 터신다. 소위 뒤끝 없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대표적 주자다. 이웃들이 지어 준 별명이 '변호사'였다. 목청 크고 성격이 활달하여 '깡통 아지매'라는 별명도 함께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맘에 들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어머니의 강한 성향 덕분에 끝까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도 안다.
의존형 인간, 소통에 서투른 내향적 인간이면서도 내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外强內强이셨던 어머니의 헌신 덕분이다.
20년 전인 2002년, 86세로 병원 신세 한번 크게 지지 않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는 영원한 내 마음의 의지처다. 샤워하다 쓰러져서 실려간 중환자실에서 하루 만에 눈을 감으셨다. 의사가 24시간을 넘기지 못한다고 진단한 그대로였다. 멀리 부산에서 올라온 큰아들이 영동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로 들어선 지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셨다.
그때 나는 마흔여덟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는 아랫채로 옮겼다. 20년 이상 어머니와 우리들이 생활했던 안채는 이제 다른 가족들의 새 보금자리가 되었다.
내가 고3이 된 직후 우리는 그 집을 떠났다. 동네 빵장수 아저씨가 두 번째 집으로 마련해 둔 집에 전세를 들었다. 옛날 집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사를 한 낯선 집이었다.
마당은 부엌으로 향하는 통로 역할밖에 하지 못할 정도로 좁아서 아예 없는 편이었고 조그마한 방 두 개와 좁은 부엌과 천정 낮은 다락방 하나가 있었다.
그 모든 변화의 격랑 속에서도 매일 아침 어머니는 동생 둘과 나, 세 명의 중고등학생 도시락을 싸 주셨고 통학 차비를 주셨고 문제집 살 돈을 주셨다.
하교 후 한숨 자고 독서실로 가서 새벽 네 시 통금시간이 풀릴 때까지 입시 공부를 했다. 컴컴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집으로 돌아오면 선잠을 깬 어머니가 단 한마디의 지청구도 없이 바로 대문을 열어 주셨다. 부담이 되셨을 독서실 사용료도 기꺼이 마련해 주셨다. 나는 다시 잠깐 눈을 붙이고 등교를 했다.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시장 골목에서 반찬 장사를 시작하셨다. 작은 아버지가 경영하시는 가게 앞 맞은편 골목 시장에 앉아 야채랑 밑반찬 등을 파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지붕도 없는 그 자리를 지키셨다.
해가 지고 행인들이 뜸해지면 남은 물건들을 챙겨 담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셔서 우리들의 저녁을 차려 주셨다. 구겨진 돈을 차곡차곡 펴서 동생 둘과 나의 통학 차비와 청구했던 돈을 비닐 장판 아래에 넣어 두셨다.
우리들은 학교 소풍이나 수학여행, 단체 영화 관람까지 당연한 권리인 양 모두 다 누렸다.
아들, 딸을 차별 대우하지 않고 키우신 어머니의 좌우명은 '똥 묻은 주우(속곳 바지)를 팔아서라도 공부는 시킨다'였다.
조금이라도 값싸고 싱싱한 야채를 직접 구입하기 위해 구포로 김해로 어머니는 새벽 일찍 집을 나서셨다. 우리가 눈을 뜨면 부엌에는 도시락과 아침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집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 집에서 결혼을 했다. 오랜 이웃인 집주인 빵장수 아저씨와 낮은 전세 가격으로 매번 협상을 해 가며 어머니는 오랜 기간 그 집에서 지내셨다.
우리들이 모두 자라 각자 자기들의 가정을 꾸려 독립해 나가고 어머니 혼자 남으셨을 때도 방 하나에 다른 할머니 한 분을 월세로 살게 하면서 같이 지내셨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시작된 연애 기간 3년 동안 남편은 부지런히 그 협소한 집을 드나들었다. 결혼 후 처가와 친정과 외갓집이 된 그 집으로 나는 어린 두 딸들을 데리고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함께 사시는 할머니 방에서 어머니랑 두 분이 주무시고 우리는 좁은 어머니 방에 머물렀다.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시간들이었다.
멀리 서울에서 내려온 우리들에게 조금이라도 귀한 것을 먹이려고 최선을 다하셨던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만이 그 시간들에 대한 애잔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