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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ug 28. 2022

삶은 순교입니다, 순교는 사랑입니다.

  만나는 여정, 만드는 여정.

 한티 처녀 순교자의 한 / 주강


대구에서 군위를 향해 북으로 넘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비껴 나면 송림사(松林寺)이고 여기서 빠른 걸음으로 두어 시간쯤 가면 오솔길뿐인 산허리에서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한티성지에 이른다.


필자는 1988년 5월 24일경 성직자가 포함된 교계 인사들과 역사학자 등으로 구성된 「한티 순교자 묘소 이장을 위한 조사ㆍ발굴팀」에 합류했다.


조사ㆍ발굴 결과 한티성지는 1백20년 전까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교우촌이었으며 처형당했던 순교지임과 동시에 그분들의 시신이 그대로 묻혀 있는 곳이라고 재확인되었다.


한국에 성지가  많지만 교우촌ㆍ처형지ㆍ묘소의 3요소가 한 자리에 있는 성지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조사ㆍ발굴작업을 한 지 4년 반이나 지난 오늘에도 그 당시 느꼈던 참혹함과 전율이 나의 신앙에 대한 경이를 새롭게 한다.


이에 1868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처형 모습과 생활상 등을 그날 느낀 대로 사실대로 재현하여 보고한다.


처참한 살육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전날 밤 한티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가산(架山)의 산무리에 당도해 있던 대구 감영(監營) 포졸들은 동녘이 터자마자 행동을 시작한 것이다. 저 골짝 옹기굴에는 누가 살고 이 골짝 숯가마에는 내일 군위(軍威) 장에 내다 팔 숯포가 얼마인지 훤히 조사해 둔 터라 토끼 사냥하듯 포졸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항거하는 교우들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었다. 독 안에 든 쥐 잡듯 땅 짚고 헤엄치듯 포졸들은 얼마나 신바람 났을까.


사람 사냥을 끝낸 포도대장은 졸개들과 잔치 마련이 한창이다. 오랏줄에는 제대로 먹지를 못해 여윈 몸들이 굴비 엮듯 주렁주렁 엮여 있다.


『이놈, 그래도 천주인가 뭔가를 믿겠는가?』 곤장 소리와 노성은 잔치판의 풍악이다.

『왜 말이 없는가? 저놈이 말을 들을 때까지 매우 쳐라.

시대극에서나 많이 보는 장면이 한참은 이어진다. 단 한마디

『믿지 아니합니다.

하면 국이며 밥이 양 껏이요 정든 고향도 단숨인데 그 한마디를 못한 죄로 온 산이 진달래로 덮인 1868년 봄의 한티골은 순절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당시의 한티는 울창한 숲과 우악새에다 넝쿨이 줄기 줄기 얽혀 짐승도 힘겨워하는 골짜기였고 주민들은 옹기를 구워 한밤중에 내다 팔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면하고자 갈아 놓은 밭에서 나는 넉넉지 못한 푸른 것들에 의지하고 있었다. 집이라고는 땅과 맞붙은 갈대 지붕에, 남의 눈도 피하고 만만찮은 바람도 겁이 나 문을 개구멍만하게 달아 대낮에도 캄캄한 토굴이다.


밟혀도 짓이겨져도 믿음으로 인한 기쁨으로 이런 것들은 오히려 기쁨이었으리.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가. 파헤쳐진 묘 1기는 더 갈 수도 없는 비탈길의 마지막 부분에 있었다. 서 있기도 힘든 곳을 어느 분이 이토록 정성스레 발굴하셨는지 누워있는 백골(白骨)을 쳐다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어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시신(屍身)의 목이 없었다. 아니 목은 허리춤에 찬 듯 아랫도리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단칼에 베였는지, 아프시지는 않았는지 목뼈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부서진 곳 없이 숫자도 맞고 살점만 곱게 칼을 받은 하였다. 이분이 누구신지 몇 살이신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한 채 일어나지를 못했다.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또 어느 분이신가 재촉하였다.


분을 따라 솔가지에 눈을 찔리며 미끌미끌 허겁지겁 산길을 탔다. 이곳도 묘가 있을 수 없는 가파른 곳이었다. 이번에도 목은 제자리가 아니라 아예 발꿈치 부근에 놓여 있었다.


묻으려면 곱게 묻지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나 이럴 수가 있는가.

뜨거운 것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이것 보소, 이분은 외롭지 않네.

딱 6~7세는 됨직한 어린이의 하얀 뼈가 평평한 땅 위에 어미 옆에 꼭 안겨 있는 듯 놓여 있었다. 사내아이였다. 머리뼈에는 상처가 있었다.


『내가 왜 해부학을 공부하여 이런 험한 꼴을 보는가?

고 혼자 중얼거리며 도살장에 소 끌려가듯 당도한 곳은 산아래 다른 마을의 입구였다.


뼈는 뼈 같은데 무언가 이상하다는 일행 중 한 사람의 말이었다.


 소리 지르지 마소, 소여물 썰 듯 사람을 아랫도리에서 한 번 「댕캉」 작두질하고 발목에서 또 한 번 「댕캉」하여 긴 뼈만 두 개가 가지런하였다.


『개새끼들』

큰소리 지르듯 외쳤는데 아무도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봄의 햇살은 헤프다. 또 한 줄로 길게 되어 다시 산으로 오른다. 마지막으로 두 시신(屍身)이 합장된 듯한 곳에 닿았다.


한눈에 여자임을 알아보았다. 나이도 많지 않았다. 누군가가

『처녀이지요?』

하였다.

그래서 힘 없이 한번 웃었다.


한 처녀는 얼굴뼈가 짓이겨져 있었고 다른 한 처녀는 머리통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이건 창으로 찔린 구멍, 이건 몽둥이로 맞은 상처』

내가 외치는 말에 나를 둘러싼 분들의 눈에 광기(狂氣)가 엿보였다.

『죽일 놈들!』

이번엔 내가 아닌 남이 그것도 여럿이 함께 소리 질렀다.


『죽일 놈들』

나도 따라 하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했다.


어떤 신부님이 (그날은 하도 놀라 어느 분인지 이름도 기억 못 한다) 이분들의 나이는 꼭 알아야겠다 하시기에 손수건에 고이 싸서 가져온 이빨 두 개를 X-레이로 연령 감정한 결과 한 분은 19세, 다른 한 분은 23세 전후였다.


한티의 순교자 거의 모든 이의 뼈가 1백20년 세월에도 썩지 아니하고 색이 변하지 않은 것은 그 골짜기의 흙 탓인지 주님만을 따르다 가신 님의 순결 탓인지 우리로선 답을 내릴  없었다.


주강 토마스 아퀴나스ㆍ경북대 의대 해부학교실

1992년 12월 20일 가톨릭 신문




30년 지기 성당 자매의 권유로 <대구 대교구 17 성지 순례, 왜관 수도원 전례 탐방> 프로그램에 동참하였다.

2022년 8월 20일~22일.

2박 3일의 여정이었다.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둘러본 성지는 구룡 공소, 진목정 성지, 성모당, 성직자 묘지, 성 유스티노 신학교, 관덕정, 계산 주교좌성당, 비산 성당, 복자 성당, 순교 복자 삼인  묘, 가실 성당, 신나무골 성지, 새방골 성당, 한티 성지, 고 김수환 추기경님 기념 성당, 황금 성당 등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성지는 거의 대부분 순교 성지이다.


정조 8년(1784)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의 매부인 이승훈(1756~1801)이 베이징에서 서양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 이 땅에서 신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세도 정치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민생이 어려워지자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가 공감을 불러일으켜 고통받는 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고 특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이 널리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조정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천주교를 조선 사회의 기본 질서인 儒敎에 반대되는 邪敎로 규정하였다. 또한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숙청하는 정치적 도구로 천주교 대박해를 시행하였다.


1791 신해 박해 (정조)

1801 신유박해 (순조)

1827 정해 박해 (순조)

1839 기해박해 (헌종)

1846 병오 박해 (헌종)

1866 병인박해 (고종)

등으로 거의 백 년에 걸쳐 만 명 이상의 순교자가 처형되었다. 특히 대원군 집권 시 행해진 병인박해는 9명의 프랑스 신부, 8000여 명의 교우들이 처형된 사상 최대의 박해였다.

1886년(고종 23) 朝佛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허용되면서 박해는 멈추었다.


백 년이나 지속된 긴 박해를 피해 교우들은 산으로 산으로 숨어들어 숯을 굽고 옹기를 빚으며 교우촌을 이루었다. 생산해 낸 숯과 옹기를 지게에 지고 멀고 험한 산길을 타고 내려가 장에 내다 파는 일이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이번 순례의 첫 목적지인 구룡 공소는 청도, 영천, 경산의 3개 시, 군을 접하고 있는 해발 675 미터 높이의 구룡산 산정에 자리 잡은 박해 시대 교우촌이다.

쫓기고 쫓겨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첩첩산중 깊은 산골로 들어온 것이다. 지금도 백여 명의 주민들이 구룡 공소를 지키며 피정의 집도 운영하고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프랑스 외방 선교회에서 파견되신 신부님들의 목숨을 건 포교 활동, 1만 평의 땅을 쾌히 기부하여 현재의 대구 교구청 자리에 성모당, 성직자 묘지,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될 수 있게 한 평신도의 봉헌 등 기도와 실천으로 일구어낸 신앙 선조들의 아름다운 흔적을 둘러보는 뜻있는 순례 여정이었다.


이번 순례 여정 중에서 가장 마음에 크게 와닿은 곳은 한티 성지이다. 감옥에 갇힌 가족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경상 감영이 있었던 대구와 가까운 팔공산 깊은 산속 한티로 숨어든 교우들은 피난 생활을 하며 순교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1868년 갑자기 나라의 명령을 받은 가산 산성의 병사들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합세하여 한티 신자들을 체포하고 현장에서 백여 명을 바로 처형하였다.

장에 다녀오느라 이 피해를 면한 몇몇 가족들이 피 바다가 된 마을에서 마구 뒹구는 처참한 시신들을 그냥 그 자리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1961년부터 조사가 진행되어 37기의 무덤을 조성하였다. 그 무덤들을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이 마련되어 있다. 대구 문화 해설 봉사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이 성지의 역사를 전해 듣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다.


제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제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하기까지 1시간여에 걸쳐 십자가의 길 기도를 끝내었다. 모두 숙연해졌다.

신앙의 진리를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온갖 수난과 고문 끝에 목숨까지 바친 신앙 선조들의 뜨거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 우리들의 마음을 뭉클하니 적셔 왔다.


봉사자가 글 한 편을 읽어 주었다.

1988년 한티 성지 조사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경북대 의대 주강 교수님이 4년이 지난 후 세례를 받고 가톨릭 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녹음이 우거진 팔공산 깊은 숲 속, 초라한 작은 묘지들 앞에서 읽는 사람도 울먹였고 듣는 우리도 울었다.


핍박과 고난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분들의 삶이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은 무엇인지.

초록으로 뒤덮인 여름 산속에서 우리들은 잠깐 깊은 정적 속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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