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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13. 2021

욕심

   인정에의 욕구

 

 우물 안 개구리의 좁은 세계에서 가족들의 기대와 지원을 한 몸에 받으며 모범생으로 성장해 온 나는 욕심인 줄도 모르고 품고 있는 욕심들이 꽤 많았다. 그중에서도 인정에의 욕구라는 욕심이 나를 많이 힘들게 만들었다.


 초중고 학창 시절, 창의력보다는 암기력으로 평가되고 밖으로 나돌기보다는 집에 많이 머무르는 차분함으로 운 좋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나에게 옷 입혀진 그 욕심은 목과 마음의 기브스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부모라는 우산 밑을 떠나 독자적인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성인이 된 후에는 내 생활의 큰 걸림돌이 되었다. 어디서나 인정받아야 하고 어디서나 중심인물이 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좌절하고 원망하는 자기애성 성격 장애자의 괴로움과 외로움을 내 등에 짊어지게 된 것이다.

 40대 초반의 두 딸들은 엄마가 자존감이 낮아서 인정에의 욕구가 강하다고 한 방에 철퇴를 내린다. 이중 언어를 쓴다고도 한다. 내가 회피성 성격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일곱 형제 중 내가 다섯째이니 쪽진 머리에 비녀 꽂으신 나이 많으신 어머니는 삼시 세끼 대가족인 우리들을 먹이는 일만 해도 바쁘셨다.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우연히 경대 위에 놓인 친구 어머니의 수첩을 보게 되었다. 1960년 대, 그 시대에 어머니가 수첩을 사용한다는 것만 해도 경이로웠는데 그 수첩의 맨 첫 장에는 달필의 만년필 글씨로 윤동주의 '서시'가 적혀 있었다. 그 친구는 장녀였고 어머님은 여고까지 나오신 인텔리셨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ᆢ ᆢ ᆢ


 그것은 나에게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아니, 어머니가 어떻게 이 시를 알지? 이건 한창 문학소녀인 우리들만의 전유물이 아닌가?'

 

 장녀인 그 친구가 부러웠고 파마머리의 젊은 어머니가 부러웠고 그 어머니의 빛나고 세련된 지성미가 부러웠다. 내가 진학한 소위 일류에 속하는 중, 고등학교에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처한 우리 집 가정환경은 어린 내 마음에 여러모로 불만족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나에 대한 어머니의 희생적인 헌신과 가족들의 사랑을 알기에 그에 대한 부담감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복잡한 심경들이 내 자존감을 아주 낮게 깎아내렸다. 나는 그만큼 더 인정에의 욕구에 집착했던 것이리라.


 남을 인정하기보다는 인정받는 것에 익숙했던 시간들이 계속 이어질 수는 없었다. 특히 결혼 생활은 그 욕구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들의 연속이었다. 완전히 다른 문화와 다른 가치관과 다른 성장 배경 속에서 자라나 의무와 책임만을 크게 안은 자리, 인정이나 존중에의 욕구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일방적인 의무 수행 역할만 주어졌다. 가부장제적 경상도 시골 장남의 맏며느리라는 자리는 긴 시간 나에게 심한 좌절과 결핍을 안겨 주었다. 


 상대에게 필요하긴 했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는 도움들까지 자진해서 떠맡아 행해 온 나의 그 알량한 의무방어전은 내가 원하는 칭찬과 인정으로는 조금도 연결되지 못했다. 오히려 황량한 빈 들판의 차가운 바람이 되어 내 마음을 춥고 허기지게 헤집었다. 표정은 굳어지고 말수는 줄어들고 그나마 미숙했던 소통 능력은 더 퇴화해 버렸다.


 일편단심, 시종일관 변치 않는 성실한 태도를 보아서라도 척하면 알아듣고 배려해 주어야 한다는 지극히 미성숙한 태도로 시집살이에, 결혼 생활에 뛰어들었으니 갈등과 소외는 이미 예고된 것이었으리라.

 '나'로 꽉 차 있었으니 무슨 소통과 이해의 능력이 있었을 것인가. 그것도 다름 아닌 경상도 사나이, 어머님 이마의 빛나는 별, 형제들의 가슴속 뿌듯한 자부심의 주인공인 장남이 내 남편이었으니ᆢ. 옆과 뒤를 보지 못하고 앞만 보는 뻣뻣한 목으로 무슨 이상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내가 희망했던 긍정적인 상호 작용은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힘들고 어두웠던 시간들이다.


 내가 내 어리석은 욕심을 일찌감치 알고 좀 더 빨리 내려놓았더라면, 일찍이 다른 사람의 욕구와 소망을 공감하는 따뜻한 눈이 있었더라면 상대방의 성향에 장단 맞춰 흡족한 인간관계를 이루어냈을까? 훨씬 폭넓게 상대방을 품어 안았더라면 관계로 인한 삶의 질이 훨씬 더 나아졌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고 고집 센 나는 인정에의 욕구라는 욕심에 사로잡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초점이 어긋난 잘못된 노력을 하느라 낑낑거리며 달려왔다. 만족과 감사라는 평화의 열매는 맛볼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어리석은 욕심, 상대 또한 그 욕심을 채워 주거나 이해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에 너무 많이 겪어 온 좌절과 분노의 감정들.


 늦어도 한참 늦은 지금 이 시간, 결혼 생활 44년이라는 이 시점에서 느끼는 아쉬움. 누울 곳 보고 발을 뻗는 지혜가 어찌 그리 없었을까? 갈 길은 멀고 생각과 행동은 아직도 유연하지 못하기에 목표점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단지 부모인 우리들의 불화로 인해 받은  아이들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보듬어 안아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힘든 세상을 살아갈 건강한 힘을 지니는 일에 도움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잘못된 욕심을 가지고도 용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하다는 박경리 선생님의 글귀 하나가 큰 위로가 된다.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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