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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Jan 12. 2023

보고 싶은 얼굴 1/3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ᆢ

 띠띠띠ᆢᆢ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는 여섯 자리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잡이를 돌렸다. 당연히 열려야 할 문이 그대로 굳건히 침묵을 지킨다. 순간 우당탕 거실을 가로질러 뛰어 나오는 두 손주 녀석들의 힘찬 발소리와 높은 옥타브의 밝은 목소리가 함께 새어 나온다.


 "할머니세요?"

 "응."

 한 살 많은 누나, 외손녀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

 "만약 할머니가 맞다면 다음 문제를 풀어보세요."

 "으응."

 나는 문 밖에서 슬며시 웃는다.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어떤 간식을 먹이고 싶어 할까요?"

 "1. 과일, 2. 사탕, 3. 고기."

 나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1 ~~!!"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이 바로 열렸다. 아래위로 겹쳐진 하얀 두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다.


 숨 가쁜 설명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 엄마 아빠가 의논하여 오랫동안 써왔던 현관 비밀 번호를 바꾸었다. 그 숫자는 네 가족의 생일 숫자를 섞어 이러저러하게 만들어졌다.

 20개월 어린 연년생 남동생은 야무진 누나의 설명을 따라잡지 못한다. 대화의 주도권을 뺏긴 채 누나의 말을 반복, 보충 설명하느라 바쁘다.  다 엄마, 아빠, 네 식구의 생일을 줄줄 왼다. 나는 다 외고 있지 못하다. 설명을 듣고 보니 여섯 자리 비밀 번호가 쉽게 외워졌다.

 "와아, 너네 가족들은 훌륭하다. 멋진 비밀 번호를 만들었네. 머리가 참 좋다."

 녀석들의 얼굴이 싱글벙글이다. 지난번 비밀 번호 여섯 자리는 믿음, 소망, 사랑의 첫 자음들을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한 것이었다.


 "그럼, 우리는 놀이하러 갈게요."

 "그래, 그래. 방학 동안 신나게 자알 놀아~."

 두 남매는 후다닥 컴퓨터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어수선하니 어질러져 있지만 내 일감을 줄이려고 딸이 최선을 다해 급하게 설거지를 해 놓고 간 것이 마음으로 읽힌다.


 과일을 잘 먹는 손녀는 수월하지만 과일을 싫어하는 손자 녀석은 비위를 맞춰 살살 꼬드겨야 한다. 살캉살캉 기분 좋게 씹히게끔 싱싱한 사과를 골라 적당히 얇은 두께로 둥글게 정성껏 잘라 깔끔하게 담는다. 좋아하는 로봇 그림 접시가 동원된다. 그 속에 스토리도 넣는다.

 "ㅇㅇ야, 이 사과가 꼭 보름달 같지 않니? 이렇게 들고 한 입씩 베어 먹으면서 초승달로, 반달로 한번 만들어 봐."

 선뜻 내켜하지 않지만 일단 입에 대보면 상큼하고 달콤한 과즙 맛에 제법 먹는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손녀 몫도 인어공주 전용 접시에 산뜻하게 담아 놀고 있는 곳으로 대령한다. '와아' 하는 감탄사와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가사 도우미 없이 집 가까이 있는 사무실에서 주 20시간 근무하는 둘째를 돕기 위해 매주 월, 수 이틀간 오후에 들른다. 주요 임무는 두 녀석 과일 간식 먹이기와 학원 챙겨 보내는 일이다. 냉장고 정리나 부엌 일도 손 갈 것들이 많다. 금세금세 쌓이는 재활용 쓰레기를 내다 놓고 음식물 쓰레기도 정리한다. 선 채로 부산하게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서너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갈 길이 바쁘다. 가까워서 다행이다.


 2년 전, 6개월 정도 멀리 떨어져 살았을 때는 아예 1박 2일을 머물렀다. 안방에서 손주들과 함께 잤다. 넓은 침대 위에서 내 양 옆에 둘이 붙어 셋이서 잤다.

 잠들기 전 손주들과 같이 하는 하나의 의례가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 중에 감사한 일 세 가지씩 이야기해 보기. 순수한 아이들은 조금도 거부감 없이 진심으로 그 시간을 좋아했다. 립서비스도 할 줄 알아 매번  째 감사할 일은 할머니가 오신 일이라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누나가 그렇게 말하면 동생 녀석도 의젓하게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곤 했다.

 세 가지 감사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주기도문, 성모송, 영광송을 바쳤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 시간은 무조건 칭찬해 주고 무조건 예뻐해 주며 서로가 무한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고 불러오는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초등 1, 2학년 때였으니 등하교도 보살폈다.


 오늘 둘은 방학식을 했다. 초등 3, 4학년을 마치고 이제 3월이면 4, 5학년이 된다.

 엄마는 전공을 바꾸어 힘든 약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아빠는 정말 바쁜 직장 일에 매여 있을 때 연년생 두 녀석이 똑같이 기저귀 차고 공갈 젖꼭지 쮸쮸 물고는 내복 차림으로 뒹굴며 잠투정하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이렇게 껑충 커 버렸다. 고맙다. 대견하다. 

 둘째 손주 녀석은 엄마가 1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끝낸 바로 그날밤에 태어났다. 2013년 12월 21일. 추운 겨울날, 만삭의 배를 안고 독서실을 다니며 밤 늦은 시각까지 시험 공부를 하고 짬짬이 20개월 짜리 딸을 돌보며 어려운 기말 시험들을 아슬아슬하게 치러낸 엄마, 우리 둘째. 두고두고 화젯거리가 되곤 한다.


 가까이 살며 자식들과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다. 바쁜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니 다행이다.

 주어진 건강과 시간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서 좋다.

 

 겨울 저녁해는 짧다. 금세 어둑해진다. 퇴근길 지하철 사정도 만만치 않을 시간이다.

 딸이 사진과 함께 카톡으로 알려 온 쇼핑백을 챙겨 들었다.

 " 엄마~ 식탁 의자에 이 쇼핑백 있는데 엄마 두고 가셨던 조끼랑 영양제 하나 있어요! 영양제 하루에 1개 꼭 드세요~ 혈관 건강에 좋은 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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