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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r 01. 2023

벼르고 벼른 생일 선물

 순천을 향하여

 "있지요? 자기, 나 도와줄 일이 있어요."

 "ㆍㆍㆍㆍ."

 "내 생일 선물을 샀어요."

 "잘했어."

 "12만 5천 원짜리, 1박 2일 여행 상품이에요."

 

 순간 남편의 안색이 급변합니다. 실망과 거부의 먹구름으로 뒤덮입니다. 나는 재빨리 뒷말을 잇습니다. 붉은 홍매화와 천년 고찰, 남도의 봄맛 탐방, 친구와 같이 어쩌고 저쩌고ᆢ

 남편의 표정은 더욱 무겁게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침울하게 말합니다.


 "이제 겨우 체중이 늘기 시작하는데ᆢ."

 "바로 그다음 날이 항암 치료받는 날인데ᆢ."


 남편의 이런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미리 말하지 못하고 출발하기 바로 전날밤, 그것도 저녁 9시, 남편이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어렵게 어렵게 꺼낸 말입니다.

 가족 카톡방을 통해 아이들에게도 알렸습니다. 잘 다녀오시라는 답글들이 바로 올라왔습니다. 아들은 손녀랑 며느리랑 세 식구가 화상통화를 걸어왔습니다.


 나는 이미 이틀에 걸쳐 부지런히 음식 준비를 끝내놓았습니다. 재래시장에서 낑낑 장을 보아 온 싱싱한 홍합을 삶아 껍데기를 골라내고 주홍색 볼통한 알맹이랑 뽀얀 국물을 내 놓았습니다. 부드러운 햇미역은 물에 불려 먹기 좋게 잘라 반투명 타파통에 담아 놓았습니다. 감자와 삼, 대추, 표고버섯을 넣은 삼계탕도 끓여 놓았습니다. 냉장고 속에는 먹고 있던 쇠고깃국과 연둣빛 완두콩밥도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미리 익혀 푹 퍼진 까만 서리태콩을 넉넉히 넣어 따끈따끈 까만 콩밥을 전기밥솥에 지어 놓을 것입니다. 꺼내어서 데워 먹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한바탕 빨래도 끝내어 포근포근 잘 말려진 옷가지들이 얌전히 제 자리에 둥지 틀고 있습니다. 말리느라 열어 놓은 세탁기 속에는 양말 한 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도보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대학병원에서 2주일에 한 번, 항암 백신을 맞는 날은 바로 다음날이 아니고 내가 귀가한 이틀 후인 화요일입니다.


 나는 여행 준비가 끝났고 내일 아침에는 길을 나설 것입니다. 불안해진 남편이 거실로 나와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답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양쪽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냉장고 앞에 나란히 서서 묻고 대답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너무나 간단하니까요. XL 고무장갑도 수도꼭지 바로 옆, 눈에 잘 띄는 곳에 집게로 걸어 두었습니다. 오랫동안 주방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던 것입니다.


 생일 선물까지 들먹여가며 1박 2일 여행을 감행하려는 늙은 여자가 야속한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남편의 불편한 심기를 46년이나 함께 산 아내가 모를 리 없습니다. 하지만 틀에 박힌 일상을 뒤로하고 오랜만에 친구와 자연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구도 부당한 것만은 아닙니다. 도에 지나친 일도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이며 무겁게 드리워지려는 자책감과 친구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삼시세끼 아내의 손길이 아니면 안 된다는 두려움도 조금은 덜어내야 합니다.


 남편은 침대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나는 다시 한번 부엌과 거실, 베란다 등을 살펴보고 배낭을 챙깁니다. 짐은 간단합니다. 잠옷 바지 한 벌과 기초화장품 두세 개, 치약, 칫솔로 끝납니다. 약간의 행동식은 내일 아침에 집어넣으면 됩니다. 견과류, 사탕, 찐 달걀, 레드향 그리고 작은 물병 하나.


 자정을 훌쩍 넘기고 잠자리에 들어 채 여섯 시가 되기 전에 눈을 떴습니다. 미리 씻어서 안쳐 둔 쌀과 그 위에 넉넉히 올려놓은 검정콩이 취사 버튼이 눌러진 지 50분 후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기며 따끈한 콩밥으로 지어졌습니다. 주걱으로 살살 섞어 커다란 글라스락 한 통에 옮겨 담고 나머지는 소복이 모아 따뜻한 밥솥 안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7시 40분, 거실로 나온 남편에게 다시 한번 식사 잘 챙겨 먹을 것을 당부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8시 10분, 교대역 13번 출구에서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습니다. 창문 앞에 붙어 있는 글귀가 마음에 쏙 듭니다.

ㅡ선암사 송광사 봄맛 탐방.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두 번 멈추는 휴게소도 즐기며 다섯 시간을 달렸습니다.


 오후 1시, 첫 목적지인 순천 매곡동 탐매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자연 속의 꽃동산이 아니라 가로 100m, 세로 50m 정도의 동네 골목길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오래된 홍매화 나무들이었습니다.

추운 날씨 속에서도 한아름 붉은 꽃망울들을 터뜨려 푸르고 높은 하늘 아래 온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꽃구름 뭉치들이 신통했습니다. 골목길 바로 옆 몇 안 되는 계단 위에 자리 잡은 텃밭 크기의 탐매정원은 소박했습니다. 홍매화 정원, 홍매가헌이라 이름 붙인 개인 집 정원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꽃밭에는 곳곳에서 땅을 뚫고 새싹들이 솟아오르고 수선화, 히야신스ᆢ, 조그만 꽃을 피운 여린 모종들이 조촐하게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정원 곳곳에는 말라붙은 식물의 흔적과 흙만 담겨 있는 빈 화분들이 아직은 오지 않은 화창한 봄날의 주인공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꽃을 좋아하는 주인장은 탐매마을 홍매관광 활성화를 위해 기꺼이 사저를 공개하는 모양입니다. 블록이 깔린 길 이외에는 밟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줍니다. 이제 곧 새싹들이 여기저기 땅 속에서 고개를 내밀 테니까요.


 2시 30분이나 되어서야 연밥으로 유명하다는 수련산방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순천에서 지명도가 꽤 높은 식당인가 봅니다. 그 시간까지 점심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보다 이른 시간에는 다른 단체 손님을 더 받을 수 없다기에 우리들의 점심 식사 시간이 이렇게 늦게 조율된 것입니다.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찰진 연밥과 생선구이, 나물 반찬, 오이무침, 겉절이, 된장국 모두 맛있었습니다. 네 명씩 마주 앉아 나누어 먹자니 양이 부족했지만 너무나 바쁜 주인장에게 추가 반찬을 부탁할 수 없었습니다. 아껴 먹으니 더 맛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경에도 신경을 쓴 듯 그리 넓지 않은 마당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있었습니다. 시들어 물기를 잃은 갈색 연꽃대들이 어수선하게 쓰러져 엎드린 채 아직은 추운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봄꽃 운운하기에는 아직은 이른 날씬 듯합니다.

 허술해 보이는 야외 화장실의 한 개밖에 없는 수세식 변기,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비데 좌변기의 온기는 아주 반가웠고 인상적이었습니다.


  3시 40분 식당을 나와 4시 30분 낙안읍성 민속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사적 제302호,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문패를 달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시댁으로 향하던 추석 귀향길, 남편과 함께 따뜻한 낮에 들렀던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꽤 호젓하고 썰렁했습니다. 그때는 호객행위하는 장사꾼들의 떠들썩 높은 목소리와 먹거리를 사 든 관광객들이 골목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모형에 불과했지만 전통 대장간 구경도 하고 돈을 내고 잠깐 골목을 돌아 주는 황소가 모는 수레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기도 했습니다. 꼭 다시 한번 여유롭게 와 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오늘은 모두 휴업 중이었습니다. 아직은 본격적으로 관광객이 몰려들 철이 아닌가 봅니다.

 별 구경거리 없이 노란 햇짚으로 이은 새 지붕을 덮어쓴 초가집들 사이, 바람이 몰려다니는 동네 골목길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었습니다. 계단을 올라 바람이 좀 더 기세를 부리는 성벽길도 걸었습니다. 훨씬 좁고 훨씬 짧았지만 중국 관광에서 잠깐 맛보았던 만리장성을 떠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5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달리는 사이 날이 점점 저물어갑니다. 갑자기 누군가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서해안의 낙조, 저녁노을을 꼭 보아야 한다고. 사람 좋은 가이드는 서둘렀습니다. 와온해변으로 향했습니다.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해는 점점 빨리 산 너머로 사라져 갔습니다.


 6시 20분, 와온해변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바다 물결과 얼굴 맞대고 있는 하늘이 사이좋게 빨강도 아닌 분홍으로 엷게 물들었습니다. 쉽게 사라질 것이기에 더 아름다운지도 모릅니다. 다급하게 셔터들을 눌러댔습니다. 삼각대에다 촬영 카메라까지 준비해 온 분들도 마음과 동작이 모두 급해져 우왕좌왕 자리들을 옮겼습니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노을도 점점 어둠 속에 잠기고 이제는 숙소로 향했습니다.

 늦은 점심 후라 숙소 근처 식당에서 일 인분 청국장을  둘이 나눠 먹은 친구와 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며 만족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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