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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pr 26. 2023

 내 생애 첫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

 한복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 큰올케를 따라 시내 영화관으로 나들이를 했다. 새언니는 꼬마 시누이인 나에게도 예쁜 옷을 골라 입히고 곱게 단장시켰다. 초등 2, 3학년이었을 것이다.

 언니 손을 꼭 잡고 버스를 탔다. 새신랑 큰오빠는 이미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신혼부부의 저녁 데이트였다. 대가족 시집살이하는 새댁이라 선뜻 나서기 어려운 밤나들이에 꼬마 시누이를 방패 삼아 앞장 세웠던 듯하다. 덕분에 호강한 사람은 나였다. 달콤한 신혼부부 사이의 거추장스러운 혹인 줄도 모르고.


 신영균, 문희 주연의 <미워도 다시  번>을 보았고 신성일, 문정숙이 최고의 연기를 보였다는 <만추>도 보았다. <낙조>라는 제목도 있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면 이미 어두워진 용두산 공원에 올랐다. 부산의 밤바다, 반짝이는 불빛들을 내려다보고 사진사 아저씨에게 스냅사진을 찍었다. 스물일곱, 스물둘 풋풋한 청춘인 두 분 사이에서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새언니 치마폭에 더 가까이 서 있던 그때  그 시간이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남았다.


 청순한 비련의 여인, 고운 한복 차려입은 문희와 오동통 눈 큰 어린 소년, 앙징맞은 양복을 갖춰 입은 김정훈이 애간장 끊어지는 모자간의 슬픈 이별을 할 때는 모든 관객들이 함께 울었다.

 늦가을 낙엽 수북한 벤치에 오롯이 혼자 앉아 오지 않는, 사실은 오지 못하는 연인 신성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문정숙의 외로운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많이 슬펐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는 학교에서 단체 영화 관람을 갔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연례행사였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며칠 말미를 두고 입장료를 거두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부반장이었던 내게 그 일을 맡겼다. 명단을 작성하고 돈을 받아 간수했다. 지갑은커녕 주머니도 흔치 않아 연필을 다 비운 필통에다 보관했다. 노심초사, 잃어버릴까 봐 꼭꼭 닫아 잘 넣어두고도 수시로 세어 보고 또 세어 보며 가슴 졸이곤 했다. 계산이 틀린 듯하면 그야말로 간이 철렁, 콩닥콩닥  새가슴이 되었다. 가난한 아이들 몇은 끝내 입장료를 가져오지 못했다.


 우리가 항상 가던 곳은 학교에서 일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천일극장이었다. 설레는 마음에 들뜬 아이들이 긴 줄을 서서 재잘대며 걸어갔다. 힘든 줄도 몰랐다.

 좁은 삼류극장이 아이들로 꽉 찼다. 좌석은 물론 계단이나 통로에도 빈 틈 없이 자리 잡고 앉았다.

 친구를 찾아 서로의 이름들을 불러대고 아이스케키 장수 소년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빽빽한 인파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불이 꺼지고 태극기 휘날리는 흑백 대한 뉴스 영상이 거창한 배경 음악과 함께 스크린을 밝혔다. 해설자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엄숙하고 비장했다.

 순간 반짝이는 새까만 눈동자들은 '합죽이가 됩시다 합' 구호라도 들은 듯 일제히 입을 다물고

뚫어져라 정면을 응시했다.


 <빨간 마후라>를 보면서 늠름한 공군 아저씨 신영균의 승리에 감동의 박수를 쳐댔다.

 <저 하늘에 슬픔이>의 주인공, 불쌍한 소년 가장 윤복이의 이어지는 고난 앞에서는 훌쩍훌쩍 소리 내며 뜨거운 눈물들을 흘렸다.


 그러나 진정한 내 생애 첫 영화로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꼽고 싶다.

 <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 >


 중학교에 입학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어느 봄날, 학교에서 첫 단체 영화 관람이 있었다. 중, 고등학교에서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있는 정기적인 행사였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여 책가방을 집에 두고 정해진 시간에 각자 상영 극장 앞에 모였다. 오는 순서대로 전교생이 줄을 서서 기다리다 시간이 되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중학교 들어와 처음 경험하는 문화행사라 신기하고 기대가 컸다.


 그 당시 보호자 역할을 했던 큰오빠에게서 돈을 타야 했다.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오빠는 단칼에 무 자르듯 내 말을 잘랐다. 어린 학생들이 무슨 사랑 운운하는 영화를 보느냐는 것이었다. 하긴 그때 내 나이 열세 살, 중1이었으니까. 글쎄 왜 하필 그때 그 첫 영화 제목이 그렇게 요상스러웠던지. 오빠의 거절에 많이 낙심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엄마를 졸랐을까? 어쨌든 나는 그 영화를 보러 갔다.


 집에서 학교보다 훨씬 먼 곳인 보수동의 현대극장, 학교에서 알려준 교통편을 이용하여 난생처음 가게 된 시내 일류극장이었다. 교복 차림으로 건물 벽을 끼고 돌아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그때의 설렘.


 처음으로 외국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개선문>과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읽으며 그 영화의 원작이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슬펐던 마지막 장면.


 참혹하고 힘든 전쟁의 실상에 회의를 느끼고 괴로워하던 인텔리 청년. 전쟁은 이제 적의 패배로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포로로 잡고 있던 적군들을 모두 사살해야 한다는 동료의 강력한 의견을 묵살하고 그는 들을 도망가라고 풀어준다. 그리고 돌아서서 사랑하는 아내가 보내온 그리운 편지를 읽었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전장으로 떠나온 처지였다. 편지에 적힌 아내의 임신 소식을 읽으며 밝은 미소로 환히 빛나던 얼굴이 순간 표정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도망가던 포로 중 한 명이 등 뒤에서 그를 쏜 것이다. 힘없이 손을 벗어난 편지는 바로 옆을 흐르는 개울물 위로 떨어졌다. 떠내려가는 편지를 잡으려 애타게 을 뻗지만 닿을 듯 말 듯 편지는 물결 따라 무심히 멀어지고 주인공의 몸은 차갑게 굳어갔다. 개울물 위로는 분홍빛 고운 꽃들이 하늘하늘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하염없이 내려앉았다.


 내 생애 첫 영화가 남긴 애잔한 마지막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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