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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06. 2023

어김없이 때가 되면

  소리 없는 선물

 유난히도 찬란한 2023년의 봄. 삭막했던 추위를 뚫고 용감하게 나타난 진분홍 연분홍, 홍매화와 벚꽃. 외로운 그들과 친구라도 해 주듯 나타난 노랑과 빨강, 개나리와 영산홍. 응원이라도 해 주겠다는 듯 부지런히 싹을 키우더니 어느덧 주인공이 되어 버린 연두와 초록, 키 큰 나무들의 무성한 줄기와 잎들.

 오소소 움츠리고 있던 봄, 고개 젖혀 쳐다보는 하늘과 한 걸음 발 내딛는 땅이 생명으로 가득 찼다.


 내려진 막 뒤로 슬며시 물러나려는 봄을 한 판 완성된 절정으로 안간힘 다해 끌어올리려는 듯 뒤이어 하양이 나타났다. 모든 색을 다 품고 있는 빛, 하양. 가장 밝은 색. 조팝나무, 이팝나무의 흐드러진 꽃송이들.


 드문 봄비가 감질나게 귀한 맛을 보이던 일주일 전, 돌 지난 손녀의 붉은 입술 속 하나 둘 돋아나는 새하얀 이빨처럼 무성해진 초록 속에 앙징맞은 하양이 하나 둘 점을 찍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눈에 띄게 커지는 하얀 점들. 베란다 열린 창으로 바람결 따라 은은한 향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오늘은 추적추적 땅을 적시는 고맙고 귀한 봄비가 이틀째 이어졌다. 오랜만이다. 아파트 출입구를 나와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은은히 온몸을 감싸 안는 달콤한 향기. 약한 빗줄기가 안개처럼 빗방울을 흩뿌려 놓은  꿈 속 같은 공간을 채우며 땅 위로 낮게 몸을 낮추고 소리 없이 감싸주는 미세한 몸짓. 아카시아꽃 향기였다. 어느새 꽃들은 봉우리를 다 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나를 아스라한 기억 속으로 데려가는 내음. 이런 간들이 또 있었지.

 살랑거리는 골목길 바람 속에 묻어왔던 라일락 꽃향기, 이른 봄에 만나는 한 해의 첫 향기. 현충원 뒷문 쪽 흙길 위에서 만난 초여름 칡꽃 향기, 누구인가 얼굴 보고개돌리면 바로 옆 철책 위에 걸쳐 있던 잔잔한 보라색 작은 꽃송이들.


 멀리는 여고 시절 늦은 밤공부를 마치고 홀로 나서는 어둑한 교정에 가득 깔려 있던 해묵은 향나무의 짙은 향기. 조금은 뿌듯했고 조금은 나른했던 혼자만의 밤길.

 여름밤 통영 남망산 공원 벤치를 휘감고 돌던 치자꽃 짙은 향기. 흥사단 아카데미 고등학생 연합회 YKA 여름 수련회.

 빨래터로 향하는 엄마 뒤를 채워 주 찔레꽃 낯익은 향기. 그 하얀 꽃 위에는 늘 몇 마리 붕붕거리는 황금색 벌들이 있었지. 엄마 머리 위에는 삐죽 삐져나온 나무 방망이와 아홉 식구 묵직한 빨랫감이 얹혀 있고.

 우물가 작은 채전밭에 피어 있던 귀한 딸기꽃. 납작하니 깔려 피는 그 꽃도 하양이었다.


 짧은 순간 다정한 옛날들이 지나갔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조금은 적막한 시간이어서일까? 고요히 정지된 화면 위에 하나하나 그리움의 옷들을 입었.


 올봄이 유난히 찬란한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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