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May 28. 2023

일상

  2023년 5월

 투두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귀에 정겹다. 무심하게 사방으로 널려있던 의식들이 한 곳으로 모인다. 우산 속 좁은 공간은 외부와 분리되어 오롯이 나 혼자만 존재한다.

 숲은 비로 젖어 있다. 차가운 빗방울로부터 따뜻하게 보호되는 이 좁은 우산 아래에서 나의 모든 감각은 좀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부터 내려와 곧은 선을 그으며 땅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들의 단호한 몸짓이 신선하다. 드러난 온몸을 비에 맡긴 채 바람 따라 가지를 내어주는 나무들의 집단, 짙푸른 녹음은 신성하다.

 인적 없는 좁은 흙길, 눈길 닿지 않는 멀리까지 이어지는 한적한 오솔길도 한껏 품을 열고 피부 깊숙한 곳으로 고마운 빗물을 받아들인다. 모두 귀한 생명수로 쓰일 것이다.


 거의 매일 찾아오는 이 길을 오늘은 근 보름 만에 들렀다. 지난 화요일 16일, 남편의 응급실 진료. 4박 5일간의 입원 치료. 퇴원 후 집에서 지낸 긴장된 일주일. 앞으로의 대책 마련 등으로 분분한 시간들지나왔다.


 회복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가지고도 치료를 많이 힘들어하고 각종 검사에 엄청 큰 스트레스를 받던 남편이 이제는 모든 치료와 검사를 거부한다. 기다리느라 지치는 진료와 불편하고 힘든 입원 생활, 힘 빠지는 금식 후의 채혈, 티 촬영 등을 앞으로 다시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거듭 선언한다.

 집이 제일 편하다, 내 집에서 지내겠다.

 남편의 강력한 의사 표명이다. 5월 31일로 예약되어 있는 주치의의 진료에도 가지 않겠다고 한다.


 남편 스스로는 최선을 다하기에  끼 집밥 식사는 힘들게 겨우 이어가고 있지만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

 컹컹 이어지는 기침 소리, 순간순간 내뱉는 신음소리와 하소연, 이곳저곳 통증 호소, 한껏 찡그린 미간에 깊이 새겨지는 굵은 주름. 둘만 있는 공간에서는 더욱 크게 와닿는다. 마음이 툭 떨어져 내려앉으며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두려운 마음에 아이들의 의견대로 동네 내과 병원에서 비상용 진통제를 처방받아 구입해 두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설명 때문에 막상 써야 할 때가 되어도 쉽게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속 울렁증 때문에 식사를 못 하게 되면 일이 커지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세 아이들과 배우자들이 모여 온다. 아빠 이야기를 들어주고 엄마를 응원하고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다. 휠체어도 구입하고 보호자인 나 혼자 가야 할 주치의 대진 진료를 위해 필요한 자료도 준비해 주었다. 가족 관계 증명서, 본인과 대리인 신분증, 교수님께 보여 드릴 말씀 메모 등이다. 여러가지 의견들이 오고간다.

 내가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2021년 4월부터 시작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 4시간 반에 이르는 대수술, 면역치료 임상실험, 항암백신 임상실험을 거치며 남편은 너무 지쳐갔다. 얼마나 두렵고 막막할까? 워낙 의지가 굳은 모범생이라 본인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지만 강력히 소망하는 기력 회복의 길은 그리 쉽지 않다.


 5월 24일, 수요일은 시어머님의 여덟 번째 기일이었다. 본당 매일미사를 봉헌하고 수도원 신부님께 연미사 봉헌 예물을 보내 드렸다.

 미사 후 어머님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어머님이 얼마나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던 장남 아들입니까? 어머님의 사랑으로 이 어려운 시간들을 잘 이끌어 주세요."


 그날 저녁부터 남편의 침대 옆에 앉아 누워 있는 남편의 손을 잡고 묵주기도 5단을 바치기 시작했다. 첫날 기도로 남편은 '빛의 신비'를 청했다.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하는 기도다. 쉽지 않은 이 길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는 우리들을 어머님은 힘껏 도와주실 것이다. 선하셨던 아버님도 함께.


 작년 이맘때처럼 남편의 네 남매 부부들이 우리 집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남편보다 두 살 어린 큰시누이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서울로 진료를 다니는 두 부부와 밖에서 만나 식사를 나누고 위로를 전했다.

 건강한 노후를 잘 이어가는 일이 만만치 않다.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다.

 본당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모병원 성당 미사를 봉헌했다. 예물 봉헌 후 옆에 놓인 바구니에 준비해  성령 은사 카드를 고르라고 하셨다.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

 경외 굳셈 효경 의견 지식 깨달음 지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남편 몫까지 두 장을 집었다. 남편에게 마음에 와닿는 것을 가지라고 권하니 '온유'를 선택했다. 온유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내 몫으로 남은 카드에는 '평화'가 적혀 있었다.

 온유를 따르면 찾아들 평화.

 

 미사가 끝난 후 대축일 강복 안수 기도를 해 주셨다.

 내 머리 위에 얹힌 신부님의 따스하고 깊은 손길을 느끼며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가장 좋은 배필로 우리를 맺어주신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좋은 배우자로 끝까지 남을 수 있도록 은총 허락하여 주십시오."


작가의 이전글 처음 받은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