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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May 18. 2023

처음 받은 선물

 벙어리털장갑

 요즘은 때마다 주고 받는 선물들이 다채롭고 넉넉하다. 정성 어린 카드, 달콤한 기념 케잌, 화려한 꽃다발, 명품 의류, 악세사리, 현금과 주식 등이 다양하게 오간다.

가정의 달이라고 이름 지은 5월은 특히 더하다.


 물질이 풍요로워지면서 시간이 지나면 가물가물 빛을 잃는 여느 선물들과는 달리 세월이 흘러도 홀로 뚜렷이 기억되는 특별한 선물이 있다.

 처음 받은 선물.


 1950년대, 마흔두 살 어머님은 일곱 째인 날 낳으셨다. 내 앞의 둘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났고 나는 다섯째가 되었다. 내 뒤로도 동생이 둘 태어났다. 일곱 남매를 거두시느라 어머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돈과 물자가 모두 귀하던 1960년대, 겨울 날씨는 매서웠고 입성은 허술했다. 두꺼운 내복 위에 겹쳐 입는 스웨터 두 벌이면 훌륭한 방한복이었다. 목을 쑤욱 집어 넣어 입는 도꾸리 스웨터와 겉에 걸쳐 입는 앞 트인 단추 스웨터.

 패딩, 방한화, 오리털 점퍼, 이런 것들은 듣도 보도 못  시절이었다.


 중학교 입시를 치렀던 1966년 12월. 고사장을 미리 둘러보는 예비 소집일과 그 다음날인 입학 시험을 치르는 날. 이틀 동안 엄마는 나와 동행하셨다. 아버지는 그 해 봄 세상을 떠나신 후였다.

 대부분 신식 파마 머리인 다른 젊은 엄마들과는 달리 우리 엄마는 쪽진 생머리였다. 조그맣고 말수 적은 나는 남의 시선을 꽤나 의식했지만 씩씩한 우리 엄마는 그딴 것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매사에 당당하셨다. 수험날 입을 겉옷으로 주머니 달린 초록색 넉넉한 스웨터를 사 오셨다. 명함판 사진이 붙어 있는 수험표를 가슴팍에 달아 벽에 고이 걸어 두셨다.


 엄마를 따라 처음 타 보는 마이크로 합승버스에서 내려 처음 가 보는 낯선 길. 학교는 약간 경사진 언덕 위에 있었다.

 정면에서 불어 오는 쌩한 겨울 바람을 맞으며 몸도 마음도 점점 추위와 긴장으오그라들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고사장을 둘러보고 내 번호표가 붙어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아도 보았다.

 할 일을 마치고 교문을 나섰다.


 중요한 일을 끝냈기에 긴장감이 풀려서일까? 이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일까? 엄마는 교문 앞 문방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셨다. 굵은 나무 기둥에 알록달록 벙어리장갑들이 조롱조롱 걸려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엄마가 골랐다. 빨간 주홍색 털장갑.

 건네받아 손을 쑥 밀어 넣었을 때 순간 와닿던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 두 손이 갑자기 천국을 만난 듯했다. 폭닥하게 숨어 있던 솜털이 긴장과 추위에 잔뜩 곱아 있던 열 개 손가락을 포근히 감싸 주었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언니들이 경주 여행 다녀오면서 사다 준 다보탑 나무 필통, 월급날 사 준 연둣빛 플라스틱 사슴 필통, 양장점에 데려가 맞춰 준 예쁜 원피스, 큰오빠가 안겨 준 낱권 위인전ᆢ.

 '선물' 하면 아련한 향수와 함께 떠오르는 것들이지만 내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새겨져 있는 선물은 엄마가 사 준 그때 그 빨간 벙어리털장갑이다.

 난생 처음 치르는 큰 시험을 앞두고 바짝 얼어 있는 어린 딸의 작은 심장을 말없이 따뜻하게 감싸 주고 보듬어 준 엄마의 뜨거운 마음이다.


'엄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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