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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Jun 21. 2023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보니, 다른 것 투성이다.

 대학 시절 연극반 활동을 했다고 하면 나는 그 상대를 무조건 추앙하는 경향이 있다. 척박한 땅에서 공연 전시 문화가 겨우 움을 틔우기 시작하던 1970년대 초, 1973년. 내가 대학 새내기가 된 그 해 10월에 부산시민회관이 문을 열었다. 연극배우 강태기가 터프한 몸짓으로 열연한 일인극 <에쿠우스>. 프랑스에서 활약 중이던 젊은 백건우가 터틀 모직 스웨터를 받쳐 입고 거장다운 연주로 피아노와 관중을 동시에 제압했던 피아노 콘서트. 기껏 이 정도가 그 시절 부산에서 우리가 누렸던 공연 문화의 정점이었다.


 영화나 책, 음악에 비해 쉬이 접할 수 없었던 희소가치 때문이었을까? 연례행사인 대학 연극반의 정기 공연은 벅찬 기대감으로 기다리던 커다란 축제였다.

 석조 건물 대학 극장 앞에 긴 줄을 서서 선착순 입장을 기다리던 조마조마한 시간, 젊은 열기로 가득 찬 컴컴한 객석에 앉아 막이 오르기를 고대하던 침묵시간, 패기만만한 지성들의 열정과 투신으로 불을 뿜는 演가 무대를 꽉 메우던 몰입의 시간.


 3학년 때였던가? 그 해의 공연 작품은 까뮈의 <페스트>였다. 유신정권, 민주화 운동 학원 탄압이 삼엄하던 시절, 그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면서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확립된 가치관이나 깊이 있는 공부도 없이 막연히 실존주의라는 단어 자체에 매료되고 까뮈의 <이방인>이 왜 걸작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열심히 읽고 뜨겁게 사랑했던 설익은 청춘의 시기였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페스트>.

 엄격하게 고립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죽음의 도시, 알제리의 오랑.

 무대 위는 깜깜했고 날카로운 섬광을 여기저기 던지는 현란한 사이키 조명 아래 하얀 마스크를 낀 웃통 벗은 청년 우들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몸짓들이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공중에서는 휙휙 내리치는 위협적인 채찍의 영상과 날카로운 음향이 공기를 갈랐다.

 침묵과 신음, 채찍 소리만으로 이어지는 강렬한 장면에 관객들은 숨을 죽였고 나도 그중의 한 명이 되어 강하게 빨려 들어갔다. 훅하고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어떤 감정. 슬픔이기도 하고 분노이기도 한 그 덩어리는 감동이 되어 가슴과 눈을 확 적셔 왔다. 그때의 그 감격이 대학 연극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내 머릿속에 마음속에 꽤 사실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브런치 마을에서 그때 그 마음을 불러오는 작가님 한 분을 만났다. 댓글들을 읽어가다 우연히 찾아간 작가님의 글밭. 후욱 빠져드는 작품들을 읽으며 나보다 10년 이상 젊은 그분의 찐 펜이 되었다.

 삶의 촉수, 이연 작가님.


 넘치는 감성과 뛰어난 지성, 탁월한 문장력에 매료되어 올라와 있는 모든 글들을 다 읽었다. 마음 아리게 만드는 감성적인 글, 한 차원 다른 세계에서 속삭이는 듯한 몽환적인 글, 최선을 다하는 일상의 삶이 담긴 따뜻한 글, 하나같이 울림이 깊었다. 왜 그리 섬세한지, 왜 그리 다정한지, 왜 그리 슬픈지. 내 마음도 덩달아 같이 녹아내렸다.


 게다가 대학 시절 연극반원이었다는 매력이 보태지면서 혼자서 그냥 그 작가를 사랑했다. 발간한 책도 구입했다. 2017년부터 투병 중인 암환우로서의 아픔을 담담하게 그린 에세이집. <암과 살아도 다르지 않습니다>.

 휙 단숨에 읽어 내렸다. 깊은 사유와 지성과 행동, 문장력에 감탄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작가님 글밭에서 작품들이 모두 사라졌다. 개성 넘치는 작가님의 모종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뜨거웠던 청춘의 진한 추억과 성실히 살아온 일상, 많이도 읽고 듣고 보았던 책과 음악과 영화들에 대한 열정, 그리고 사부라고 불리웠던 한 남자.


 지금은 일곱 편의 글만 남아 있다. 수많은 공감과 감동이 넘쳐났던 댓글창도 닫아 버렸다. 언제 또 이 글들마저 사라질지 몰라 열심히 찾아 읽는다.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글들.

 5월 20일에 올린 글을 읽은 날은 좀 많이 울었다. 담담한 글 속에 담긴 뜨거운 마음이 많이 아프게 읽혔다.

 작가님 책을 찾아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삶이 참 슬프면서도 귀하다.


 ㅡ마음의 빗장을 닫아걸고 폐쇄적 인간이 되어 고립을 자처했다. 치아가 흔들리고 손발이 저리고 발바닥 통증이 하루 24시간 지속되는 증상은 나만 알았다.  학부모 독서 동아리와 몇 군데 독서 모임에 가입했다. 도서관 강의에 참가하여 북큐레이션 수업을 받고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 도서관 큐레이션을 진행하며 사라졌던 창작열을 불태우게 되었다.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고 미니멀리즘 삶을 살기로 했다.


 바라는 건 약간의 배려라는 것. 누군가에게는 생각만으로라도 가슴 저미는 사람인 나의 희망은 살 수만 있다면, 아이들 곁에 더 오래 머물 수만 있다면,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숲을 걸을 수 있다면 아픈 사람이어도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이어도 괜찮다. 매일 싸워도 좋으니 가족들 곁에 오래 남고 싶었다.


  출간 제안은 기뻤지만 글쓰기의 목적이 출간은 아니었다. 글쓰기 목적은 글쓰기다. 중심은 글쓰기고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글 쓰고 싶어서 살고 싶다. 나의 본질은 글쓰기다. 글쓰기는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몰입과 희열로 나를 달군다. 내 안의 암세포와 공존하며 글 쓰며 살고 싶다. 그게 죽음 앞에서 만난 나의 본질이고 정체성이다. 나는 나로 인해 환희로웠다. 글쓰기에 몰입하지 않았다면 진즉에 주저앉았다. 삶의 기울기는 내 의지 밖이다. 글만 쓰고 싶어. ㅡ


 브런치 글 끝에 올려놓은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산울림의 <안개 속에 핀 꽃>.


 아침 이슬

 차가운 산 안개 속에 핀 고운 꽃잎에 아롱지면

 숲 속에는 산새들이 옛 얘기하듯

 요란하게 지저귀네.


 오오, 즐거운 날들

 안개 속에 핀 저 꽃처럼

 아름다운 너와 나의 지난 추억이

 무지개처럼 피어나네


 이 짧은 노랫말 속에 담겨 있는 현재와 과거. 시들어 있는 지금의 가슴을 옛날의 그 꽉 찼던 시공간으로 몰고 가는 듯 한바탕 굿판 같은 연주가 노래보다 더 짙고 길게 이어진다.

 하루 네 시간은 숲에서 보내고 네 시간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네 시간은 글을 쓴다는 작가님.


 작가님의 과거와 현재가 건강한 미래로 이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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