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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10. 2023

지각한 혼배성사

  관면혼배

 굽이지는 삶의 모퉁이, 그 길목마다 불쑥불쑥 얼굴을 드러내는 헤어짐과 만남. 비중이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련한 슬픔과 설레는 기대감이 늘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우리 본당에서 5년간 사목해 오신 주임 신부님께서 곧 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정년이 몇 년 더 남았지만 자청하여 본당 사목을 접으시고 퇴임을 선택하셨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한 교회활동 침체기도 있었고 2년간 남편의 고향인 함안으로 떠나가 있기도 했기에 신부님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그리 깊지 않았다. 게다가 사목자에게 쉬이 다가가지 않고 일정한 거리 밖에서 격식에 맞는 예의를 차리는 정도가 사목자를 대하는 나의 성향이기도 했다. 다만 신부님의 아름다운 미사집전이 좋았고 영성적인 강론말씀이 좋았고 모든 사람에게 다정하게 다가오시는 친밀함이 좋았다.


 6 11일에 거행된 신부님 사제서품 40주년 기념미사 소감을 브런치에 올렸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 루카복음 10장 42절. 40년 전 신부님의 사제 서품 기념 상본에 새겨진 말씀이다. 신부님께 공유해 드렸더니 무척 기뻐하셨다. 본당 홈페이지에도 실렸다.


 신부님의 퇴임을 두 달 앞둔 시점, 남편의 임종을 겪으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 청원 전화 한 통에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바로 방문하셔서 한 시간에 걸친 병자성사를 주관해 주셨고 열흘 후에는 병원 성당에서 남편의 장례 미사를 집전해 주셨다.  

 미사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고마운 인사를 많이 들었다. 커다란 위로와 감동을 받았노라고.

 장례식 전날 울며 울며 지방에서 올라와 공경해 마지않았던 오빠의 영정 앞에 쓰러지다시피 엎드려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흐느끼던 시누이 둘도 미사 후 표정이 많이 안정되고 밝아졌다.

 고인의 모든 삶이 가족들을 위한 사랑이었고 이제 하느님의 품 안에서 편히 쉬시며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실 거라는 강론 말씀이 큰 위로가 되었다.

 많은 참석자들의 깊은 애도와 사랑으로 미사 분위기가 참으로 따뜻하고 경건했던 것을 기억한다.


 장례 미사 직전, 가족들을 위한 고해성사가 있었다. 고해성사에 임한 아들은 꽤 오랜 시간 후에 나왔다.

 말씀의 전례가 끝나고 성찬의 전례가 시작되었다. 성체를 모시는 시간, 옆에 앉아 있던 아들은 살짝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며 자신은 영성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순간 서운한 마음 한가닥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미사가 끝난 후에야 그 연유를 알게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가톨릭 유아세례를 받은 아들은 개신교 신자인 며느리와 결혼을 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이든 둘 다 그리스도교이며 갈라진 형제라고 생각하는 나는 결혼식과 결혼 이후의 신앙생활을 온전히 둘의 결정에 맡겼다. 대학초년에는 말씀봉사까지 했지만 신앙생활에 열의가 식은 아들에 비해 친정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며느리의 신앙생활에 오히려 비중을 두었다.

 우연히도 사돈들 집안이 모두 가톨릭인지라 두 딸들은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아들은 시중 결혼 예식장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혼례식을 치렀다. 그리고 둘이 함께 교회에 나가는 모습이 예뻤다.

 5년 전 일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약식으로라도 혼배 성사를 봉헌하지 않은 것이 교회법에 저촉된다는 사실, 즉 혼인장애인 조당에 걸려 고해성사, 영성체, 미사 등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가톨릭 혼배성사에 대해 미처 잘 알아보지도 않고 소홀했던 나의 잘못이었다. 새아기 며느리에게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던 인간적인 마음이 앞섰던 탓이 크다.

 신부님께서는 언제든 빠른 시일 내에 관면혼배를 꼭 받으라고 충고해 주셨다. 남녀 모두가 가톨릭 세례성사를 거친 신자여야 성사혼이 성립된다는 교회법을 집행유예하는 혼배예식이다.


 2023년 8월 19일, 토요일, 오전 11시.

 둘째 사위와 딸이 증인을 쓰고 결혼식 때 마련했던 반지를 준비하여 신부님의 주례하에 관면혼배가 이루어졌다. 아들의 가톨릭 신앙생활에 걸렸던 혼인장애가 풀렸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두 돌을 앞둔 손녀는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아빠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며느리는 석 달 후면 태어날 둘째를 임신하고 있는 무거운 몸이었다. 신부님의 배려와 강력한 권고가 아니었더라면 어려운 일이었다.


 아들 가족이 가톨릭 울 안으로 들어오는 첫걸음, 남편이 아들에게 남기고 간 아름다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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