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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20. 2023

슬픔의 흔적들

 눈길 닿는 곳마다 ᆢ

 "칼이 들어 있어요."

 "네에? 칼이요? 그럴 리가 없는데ᆢ."

 내가 황당해하며 찾아내지 못하자 공항 검색대 위에 놓인 배낭 깊숙이 검색 요원의 손이 들어갔다. 과연 칼이 하나 들려 나온다. 엄지손가락보다 작고 납작한 빨간색 맥가이버 칼 하나.

 남편이 남겨 놓은 흔적이다.

 

 E가 제주도 여행을 제의해 왔다. 슬픔에 함몰되어 가는 듯한 나에게 권하는 우정의 치유 여정이었다. 흔쾌히 응낙했다. 두 차례에 걸쳐 일정을 조정하고 나머지 모든 계획과 예약은 E가 맡아서 수고해 주었다.

 9월 20일부터 26일까지의 6박 7일.  조금 긴 여정인 데다 비 예보도 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등산 배낭을 쓰기로 했다. 4년 전 남편과 함께 다녀온 스페인 여행 때 사용한 것이 마지막이다. 배낭을 탈탈 털어가며 속을 확인하고 짐을 꾸렸다. 부피가 워낙 작다 보니 배낭 한 귀퉁이에 꼭꼭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공항 검색대의 투시 광선은 과연 족집게다. 배낭 속에서 나온 칼은 수화물로 따로 부치거나 아니면 이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아쉽지만 버리는 쪽을 택했다.


 손재주가 좋고 성격이 치밀한 남편은 도구 사용을 즐겼고 각종 연장을 많이도 갖추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못이 크기대로 정리되어 있는 나무 상자, 온갖 종류의 전선들과 각종 접착테이프들, 신문지에 돌돌 말려 싱크대 한 구석에 끼워져 있는 숫돌도 있다. 무뎌진 칼을 갈고 가위도 간다. 그중에서도 남편이 가장 애지중지 가까이해 온 것은 공구세트가방이다. 1985년 남편이 다니던 회사의 창립 기념품으로 받은 인조 가죽 지퍼 가방. 정성 들여 못을 박고 느슨해진 나사를 조이고 철사를 끊고 나무를 자르던 각종 공구들이 가방 가득 정해진 자리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40년을 함께한 가방은 낡았고 지퍼는 고장 나고 공구들은 조금씩 녹슬고 때 묻었지만 잃어버리거나 손상된 것 하나 없이 잘 정리되어 있다.


 집을 넓혀 가며 이사를 다닐 때마다 집안 구석구석을 보살피는 남편의 손 안에서 야무지게 그 역할을 다해 온 손때 묻어 있는 공구세트박스. 주인을 잃은 그 가방은 이제 다시 새 주인을 찾지 못할 듯하다. 너무나 편리해진 주거 공간에다 관리실이나 수리 센터, AS 센터를 이용하면 불편함이 쉽게 바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동네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다 보일러를 채우고 옥상 위 TV수신안테나를 수시로 바로잡는 등 우리 세대 남편들이 가장으로서 몸으로 때워 온 육체노동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사라졌다.


 '같이'와 '하자'라는 두 단어를 쓰지 말라고 엄숙히 포고한 남편의 서슬 퍼런 선언에도 불구하고 자의든 타의든 참 많이도 같이 다니고 같이 행동했다.

 제주도 여행도 그랬다. 기회를 노려 설득에 성공한 이시돌 피정 2회, 큰애가 컴퓨터로 인쇄해 낸 계획서를 두 차례나 변경해 가며 어렵게 아빠의 결제를 얻어낸 '아빠 환갑 기념 제주도 가족 여행'.


 E와 함께 머문 제주도. 만나는 풍경마다 남편과의 지나간 추억과 더 많이 더 편히 오지 못했던 아쉬움이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마음을 건드렸다.

 젊은 시절 얇은 비닐 우의 하나 걸친 채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둘이서 하염없이 뚜벅뚜벅 걸어왔던 한라산 백록담 하산길, 늘씬한 종마들이 우아하게 뛰놀고 있던 이시돌 농장의 넓은 초원, 제일 아름답다는 올레길 7코스 해안길. 아홉 명 온 식구가 함께 들렀던 비자림, 휴애리, 섭지코지, 성산일출봉, 만장굴, 합덕해수욕장, 표선해수욕장 ᆢ.


 늘 곁에 함께 머물던 이가 이렇게 완전히 사라져 버린 현실에 대한 막막한 상실감. 눈앞의 모든 시간과 공간과 인물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듯한 공허감. 눈길 가는 곳마다 서러웠다. 몰래몰래 눈물을 쳤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지면 E더러 먼저 앞서 가 달라고 부탁하고 혼자 뒤로 뒤로 처졌다. 한참 눈물을 쏟아내고 걸음을 재촉하면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던 E가 말했다.


 "너네 남편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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