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화 바닷가가 있는 동쪽 구좌 마을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여기서 5박을 하고 공항에서 가까운 한림에서 1박을 할 계획이었다. 거의 매일 2만 보 가까운 걸음수를 기록했다. 주인장의 배려로 날씨가 좋은 이틀 연이어 다랑쉬 오름에 올라 성산 일출봉을 발갛게 물들이는 새벽하늘을 오래 지켜보았다.
맛집 식당을 찾아내고 그때그때 가 봄직한 행선지를 정해 버스와 카카오택시 두 가지의 대중교통수단으로만 움직였다. 정해진 프로그램의 일행이 되어 소위 패키지여행을 다니거나 렌터카로 목적지까지 네비만을 보며 움직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맛이 있었다. 제주도를 제대로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다.
덕분에 서둘러서 갑자기 마련한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았던 두 군데의 숙소를 들르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1박을 취소했다.
한 곳은 브런치 작가로 알게 된 대학 후배님이 사장으로 계시는 호텔 더그랑 서귀포점이다. 제주에 가서야 연락을 넣었더니 호텔이 구좌로 갈 수 없으니 우리들이 서귀포로 오라는 재치 넘치는 대답이 왔다.오전에 도착하여 프론트에 가방을 먼저 맡겼다. 모슬포에서 송악산 해변 둘레길을 걷고 삼막산 탄산온천을 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6인용 스위트룸이 준비되어 있었고 상이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해물 저녁 밥상, 공원 밤 산책, 이튿날 조식 뷔페는 물론 예상치 못했던 고급 점심 도시락까지, 받을 수 있는 모든 환대를 다 받고 떠나왔다.
여행의 마지막 숙소는 서쪽 한림 협제에 있는 지인의 빈집, 둘째와 초등학교 동창인 M의 할아버지 집, M의 어머니의 시댁이었다. 여행 도중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연결되었다.
제주도 여행 중이라고 했더니 M의 어머니는 단번에 그 집을 알려 주었다. 주소와 출입문 비밀번호를 보내 주고 근처 명소까지 소개해 주었다.
한적한 동네 골목 맨 끝집이었다. 그 골목 안 서너 채의 집이 모두 친척들 집이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결혼한 자녀들에게 한 채씩 집을 마련해 주었고 장남인 남편이 물려받은 집이 골목 제일 끝집인 이 집이다. 불편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시누네 집 전화번호까지 넣어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느슨하게 닫혀 있는 대문을 열고 잔디가 잘 손질되어 있는 마당을 지나 전해받은 비밀번호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까지 쓴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빈집을 고맙고 편리하게 잘 사용했다.
한림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비양도둘레길을 돌아와서는 방 한 칸씩을 차지하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깊고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녘 나를 찾아온 길고 선명한 꿈.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왜 그렇게 무겁게 들고 다녀?"
내 양손에는 묵직한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남편이었다. 껑충한 큰 키에 수척한 모습.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갖춘 양복 정장을 차려입고 007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 살아 있네! 다행이다.'
순간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누워 있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게 더 회복에 나을 것 같다며 퇴원을 시켜 주셨어. 회사에 갔더니 해외 출장을 다녀오래."
장면이 바뀌어 우리 둘은 내 친구 H의 호화로운 이 층집 파티에 와 있었다. 나는 넓은 부엌에서 다른 여자 손님들과 풍성한 음식상을 차리고 있었다. 남편이 있는 곳을 기웃거려 보니 단단한 나무 테이블이 있는 작은방에서 건장해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이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피곤하고 병약해 보이는 남편은 그 옆에서 테이블에 두 팔을 올려놓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우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보았다. 어딘지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앞서 가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남편의 병약한 걸음걸이가 너무나 불안해 보였다. 고꾸라지면 끝없는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져 심연 속으로 삼켜 버려질 것만 같았다.
남편의 휘청이는 걸음 앞에 저만치 계단참이 보였다. 그 위에 한 남자가 남편을 향해 서 있었다. 남편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남자까지도 뒤로 굴러 함께 떨어질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나는 뒤를 따랐다. 별로 넓어 보이지도 않고 안전해 보이지도 않는 좁고 위험한 계단참 위, 남자는 남편이 내려오는 정확한 위치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휘청거리며 내려온 남편을 두 팔 벌려 넓고 단단한 품으로 힘껏받아 안았다. 남편은 그 남자의 품 안에 온 몸으로 폭삭 안겼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뚜렷한 장면. 버티고 서 있는 그 남자의 허리를 뒤에서 누군가 강인한 두 팔로 꽉 안아 떠받쳐 주고 있었다.
잠을 깼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꿈을 다시 기억해 보았다. 좁고 불안한 계단 참에서 휘청이며 내려가는 남편을 꽉 품어 준 건장한 남자. 뒤에서 그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깍지 낀 강인한 두 팔. 몸이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두 팔만 크게 부각되어 보일 뿐이었다.
파티장에서 엎드려 있는 남편 옆에 앉아 있던 두 남자의 믿음직한 모습도 뚜렷이 떠올랐다.
나쁘지 않은 꿈이었다.
큰 위로가 되는 꿈이었다.
우리 모두의 소망대로 남편은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었구나!
그동안 힘겹게 걸어왔던 인생 여정의 모든 노고와 근심 걱정 불안을 다 내려놓게 되었구나!
든든한 보호자, 영원한 위로자의 품에 안겼구나!
정말 다행이다.
"여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모든 고통 근심 걱정 불안 다 내려놓고 따뜻한 사랑 듬뿍 받으세요. 편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