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Nov 23. 2023

 꿈으로 주시는 위로

 한림 협제에서의 새벽

 세화 바닷가가 있는 동쪽 구좌 마을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여기서 5박을 하고 공항에서 가까운 한림에서 1박을 할 계획이었다. 거의 매일 2만 보 가까운 걸음수를 기록했다. 주인장의 배려로 날씨가 좋은 이틀 연이어 다랑쉬 오름에 올라 성산 일출봉을 발갛게 물들이는 새벽하늘을 오래 지켜보았다.


 맛집 식당을 찾아내고 그때그때 가 봄직한 행선지를 정해 버스와 카카오택시 두 가지의 대중교통수단으로만 움직였다. 정해진 프로그램의 일행이 되어 소위 패키지여행을 다니거나 렌터카로 목적지까지 네비만을 보며 움직이던 때와는 전혀 다른 맛이 있었다. 제주도를 제대로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큰 수확이다.

 덕분에 서둘러서 갑자기 마련한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았던 두 군데의 숙소를 들르게 되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1박을 취소했다.


 한 곳은 브런치 작가로 알게 된 대학 후배님이 사장으로 계시는 호텔 더그랑 서귀포점이다. 제주에 가서야 연락을 넣었더니 호텔이 구좌로 갈 수 없으니 우리들이 서귀포로 오라는 재치 넘치는 대답이 왔다. 오전에 도착하여 프론트에 가방을 먼저 맡겼다. 모슬포에서 송악산 해변 둘레길을 걷고 삼막산 탄산온천을 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6인용 스위트룸이 준비되어 있었고 상이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해물 저녁 밥상, 공원 밤 산책, 이튿날 조식 뷔페는 물론 예상치 못했던 고급 점심 도시락까지, 받을 수 있는 모든 환대를 다 받고 떠나왔다.


 여행의 마지막 숙소는 서쪽 한림 협제에 있는 지인의 빈집, 둘째와 초등학교 동창인 M의 할아버지 집, M의 어머니의 시댁이었다. 여행 도중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연결되었다.

 제주도 여행 중이라고 했더니 M의 어머니는 단번에 그 집을 알려 주었다. 주소와 출입문 비밀번호를 보내 주고 근처 명소까지 소개해 주었다.

 한적한 동네 골목 맨 끝집이었다. 그 골목 안 서너 채의 집이 모두 친척들 집이라고 했다. 시아버지가 결혼한 자녀들에게 한 채씩 집을 마련해 주었고 장남인 남편이 물려받은 집이 골목 제일 끝집인 이 집이다. 불편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시누네 집 전화번호까지 넣어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느슨하게 닫혀 있는 대문을 열고 잔디가 잘 손질되어 있는 마당을 지나 전해받은 비밀번호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제까지 쓴 듯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빈집을 고맙고 편리하게 잘 사용했다.

 한림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비양도 둘레길을 돌아와서는 방 한 칸씩을 차지하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깊고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새벽녘 나를 찾아온 길고 선명한 꿈.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왜 그렇게 무겁게 들고 다녀?"

 내 양손에는 묵직한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남편이었다. 껑충한 큰 키에 수척한 모습. 흰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갖춘 양복 정장을 차려입고 007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아, 살아 있네! 다행이다.'

 순간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누워 있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게 더 회복에 나을 것 같다며 퇴원을 시켜 주셨어. 회사에 갔더니 해외 출장을 다녀오래."


 장면이 바뀌어 우리 둘은 내 친구 H의 호화로운 이 층집 파티에 와 있었다. 나는 넓은 부엌에서 다른 여자 손님들과 풍성한 음식상을 차리고 있었다. 남편이 있는 곳을 기웃거려 보니 단단한 나무 테이블이 있는 작은방에서 건장해 보이는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이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피곤하고 병약해 보이는 남편은 그 옆에서 테이블에 두 팔을 올려놓고 엎드려 자고 있었다.


 우리 둘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보았다. 어딘지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가 앞서 가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남편의 병약한 걸음걸이가 너무나 불안해 보였다. 고꾸라지면 끝없는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져 심연 속으로 삼켜 버려질 것만 같았다.

 남편의 휘청이는 걸음 앞에 저만치 계단참이 보였다. 그 위에 한 남자가 남편을 향해 서 있었다. 남편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남자까지도 뒤로 굴러 함께 떨어질 것 같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나는 뒤를 따랐다. 별로 넓어 보이지도 않고 안전해 보이지도 않는 좁고 위험한 계단참 위, 남자는 남편이 내려오는 정확한 위치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휘청거리며 내려온 남편을 두 팔 벌려 넓고 단단한 품으로 힘껏 받아 안았다. 남편은 그 남자의 품 안 온 몸으로 폭삭 안겼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뚜렷한 장면. 버티고 서 있는 그 남자의 허리를 뒤에서 누군가 강인한 두 팔로 꽉 안아 떠받쳐 주고 있었다.


 잠을 깼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꿈을 다시 기억해 보았다. 좁고 불안한 계단 참에서 휘청이며 내려가는 남편을 꽉 품어 준 건장한 남자. 뒤에서 그 남자의 허리를 감싸 안은, 깍지 낀 강인한 두 팔. 몸이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두 팔만 크게 부각되어 보일 뿐이었다.

 파티장에서 엎드려 있는 남편 옆에 앉아 있던 두 남자의 믿음직한 모습도 뚜렷이 떠올랐다.

 나쁘지 않은 꿈이었다.

 큰 위로가 되는 꿈이었다.


 우리 모두의 소망대로 남편은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되었구나!

 그동안 힘겹게 걸어왔던 인생 여정의 모든 노고와 근심 걱정 불안을 다 내려놓게 되었구나!

 든든한 보호자, 영원한 위로자의 품에 안겼구나!

 정말 다행이다.


 "여보,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요.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모든 고통 근심 걱정 불안 다 내려놓고 따뜻한 사랑 듬뿍 받으세요. 편히 쉬세요."


작가의 이전글 슬픔의 흔적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