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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Nov 30. 2023

특별했던 목요일

 2023. 10. 12.

 도심 한복판의 깊어가는 가을밤은 유쾌한 낭만을 품고 있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서늘한 바람 속으로 마음의 빗장을 느슨하게 풀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웃고 흔들릴 수 있는 자유로움이 흘렀다.

 몇 년 전과는 아주 다른 느낌의 새 옷으로 갈아입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 오래된 가로수와 넓은 거리로만 기억되던 공간이 아담한 꽃밭들이 들어찬 격조 있는 정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넓은 공간에 띄엄띄엄 블록 형태로 자리 잡은 꽃밭들과 그 사이사이로 뚫려 있는 널찍하고 편안한 길. 꽃밭 안에는 억새풀과 제철 들꽃들이 깊어가는 가을을 알리며 작은 바람결에도 허청이듯 흔들렸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2023 홍난파가곡제. 그곳을 막 빠져나온 우리 셋도 마음껏 흔들렸다. 세 시간 동안 서른 곡에 달하는 우리 가곡의 애잔한 서정에 푹 빠져 있었던 때문이었을까? 어디론가 무리 지어 흘러가는 군중 속의 한 사람이 된 익명성, 불어오는 가을바람, 희미한 달빛, 거기에 창백한 빛을 더해 주는 키 큰 가로등, 서걱거리는 억새풀의 유연한 몸짓. 마음 깊숙이 와닿는 우리 가곡에 이미 뺏겨 버린 마음까지 다 놓아 버렸다.


 열 시가 내뿜는 적당한 해방감과 정취를 더해 주는 빛 가로등이 그런 우리의 흔들림을 더욱 부추겼다. 고혹적으로 늘어진 꽃들로 장식된 가로등 아래에서 이런저런 폼으로 사진을 찍고 소리 내어 웃고 노래했다. 롱다리로 찍어 주기 위해 쪼그리고 앉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귓가로 날아들었던 가곡들을 떠오르는 대로 흥얼거렸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ᆢ

 바람이 서늘도 하여 ᆢ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ᆢ

 내 놀던 옛 동산에 ᆢ


 학창 시절 음악 선생님들을 떠올리며 기억나는 대로 말하고 맞장구치고 거리낌 없이 웃었다.

 셋이 한결같이 느끼는 공통된 감정은 하나.

 "참 좋은 시절이었어."

 "고마웠던 시간들이야."


 오늘은 오전부터 시작된 바깥나들이 시간이 길었다.

 11시 강남역 동창회관 공연 연습

 2시 용산성당 사별자 치유 모임

 7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홍난파가곡제


 닷새 앞으로 다가온 총동창회 공연을 앞두고 일주일에 2회로 연습 시간을 늘렸다. 화요일과 목요일. 매번 들쑥날쑥 20여 명이 참석하며 출석에 열성들을 보였지만 연습 시간보다 잡담 시간이 더 길다. 이 친구 저 친구가 준비해 온 간식 먹거리들도 풍성하다. 금세 시간이 흘러간다. 1시가 가까워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친구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향하고 나는 전철역으로 뛰었다. 신분당선, 9호선, 5호선 환승을 서두르며 마지막 내린 공덕역에서는 허겁지겁 택시를 잡아 타고 달려가 10분 지각을 기록했다.


 5시를 조금 넘어 모임이 끝나고 다시 광화문 쪽으로 서둘렀다. 6시에 만나기로 한 H와 A, 둘과 함께 이 일대 맛집으로 꼽힌다는 황태콩나물국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이른 저녁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름난 맛집답게 서비스도 맛도 훌륭했다. 편하게 식사를 즐기고 유유자적 느긋하게 바로 옆에 있는 공연장으로 입장했다.


 가을밤의 가곡. 가사와 곡조 모두 喜怒愛樂哀惡慾, 인간의 七情 중 유난히 哀만을 노래한다.

 오늘 있었던 2회 차 사별자 치유 모임 프로그램은 '떠나간 배우자에게 편지 쓰기'였다. 이미 눈물바다에 빠졌다 왔으니 눈물총량법칙을 떠올리며 가곡제 시간, 친구들 앞에서는 더 이상 울지 않으리라 자신 있었다.

 '음, 그렇지.'

 '음, 좋은 노래지.'

 대범한 척 버텼지만 한 시간을 넘어선 1부의 마지막 부분 공연에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눈앞에 그려지는 추억의 장면들.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 내 옆자리에서 A가 조용히 말했다.

 "가곡이 트로트보다 더 심해. 후벼 파네, 후벼 파."

 이 말에 울다 웃으며 무너지는 감정을 추슬렀다. 노래로 표현되는 저 슬픔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이라면 저런 가사에 저런 곡을 못 쓸 것 같다. 상상만으로 하는 슬픔이니까 저리 진하게 쓸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니라면 저런 곡과 저런 가사를 차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혼자만의 억지도 부려 보았다.


 눈물의 강한 전염성. 내 왼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낯선 여자분도 이내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내 나이 또래다. 중간 휴식 시간에 말문을 텄다. 혼자 오셨냐는 우리들의 질문에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일을 하다 좀 늦어져서 이렇게 따로 앉게 되었다고 한다. 2부에서는 함께 손을 잡고 합창도 했다. 맑고 순수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것 내려놓으며 공감 하나로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시간이었다. 헤어질 때의 정겨운 인사도 잊지 않았다.

 순박해 보이던 그분의 분위기가 그날 그 시간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혼자만의 슬픔을 꾹꾹 누른 채 함께 노래하고 이야기 나누고 추억을 만들며 나를 추스른 오늘 하루.

 특별했던 목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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