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여성인 주인공 포포의 어머니는 10대 때 포포를 임신하고 출산했다. 원래 딸과 견원지간이었던 외할머니는 딸을 내쫓았다. 홀몸으로 대필을 해서 외손녀 포포를 키운다. 포포는 태어난 이후 어머니 얼굴은커녕 어머니의 사진 한 장도 본 적이 없다. 딸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감과 후회 때문일까, 아니면 어릴 적 남의 집에 입양되어 10대째 대필가 일을 담당해 온 할머니 자신의 성장환경 때문일까? 할머니는 모질 만큼 엄한 방식으로 포포를 대필가로 양육한다. 포포가 제일 먼저 배운 말은 히라가나 47자로 만들어진 글자 연습 노래였으며 한 살 반 때 그 노래를 확실하게 외웠다. 그것을 히라가나로 쓸 수 있게 된 것은 3살, 가타카나로 쓰게 된 것이 네 살 중반 때였다. 할머니가 혼신의 힘을 다해 주입한 결과였다. 여섯 살이 된 해 6월 6일, 자신의 배냇머리로 만든 전용 붓을 들었다. 처음으로 서도에 입문한 날이다. 할머니는 교토의 장인에게 주문해서 특별 제작한 오동나무 문구 상자를 선물로 주셨다. 그 속에는 팬과 만년필 등 대필 관련 도구가 빼곡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 이후 저녁을 먹고 나면 매일 글씨 연습 시간이 이어졌다.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2학년 때까지는 1시간, 4학년 때까지는 1시간 반, 6학년 때까지는 2시간을 할머니가 옆에 붙어 앉아서 지도했다.
붓을 똑바로 세워, 팔꿈치를 들어, 곁눈 팔지 마, 몸은 정면을 향하고 호흡을 똑바로 해!
할머니의 주문은 차갑고도 혹독했다. 이 주문에 완벽을 기하지 않으면 바로 손을 때리며 사정없이 호통쳤다. 하루 쉬면 사흘을 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수련회 수학여행 때조차 붓펜을 가져가서 선생님 몰래 연습했다. 할머니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할머니는 쇼난에서는 대필가로 유명한 분이셨다.
할머니의 가르침을 온순하게 지키고 따르던 포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대들었다. 대필이란 사기이며 전부 엉터리고 거짓말투성이라고 선언했다. 할머니는 대필의 필요성에 대한 당신의 가치관을 열심히 설명했다. 편지를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사람, 자기 마음을 술술 잘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마음을 더 잘 전달해 주어서 누군가의 행복이 되고 감사를 받는 일이 대필이라고.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여름부터는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할머니의 세심한 지도에 최대한 노력해서 맞추다가 어느 날 뚝하고 인내심의 끈이 끊어진 것이다.
"시끄럽네, 빌어먹을 할망구, 닥쳐!"
"당신 인생을 나한테 강요하지 말라고ᆢ."
"요즘 세상에 무슨 대필이야, 웃기지 마ᆢ!!"
들고 있던 기념 붓을 힘껏 다다미 바닥에 패대기쳤다. 바로 옆에 있던 문구 상자를 발꿈치로 밟아버리기도 했다. 동급생들은 바다로 산으로 놀러 가는데 어째서 나만 이 더운 날씨에 글씨 연습을 해야 하는지 냉정하게 생각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꿈틀거렸던 분노와 의문이 마그마처럼 단숨에 분출되었다. 그대로 집을 나가 자전거를 타고 패스트푸드점으로 달려갔다. 햄버거를 거의 씹지도 않고 단숨에 콜라로 흘러내렸다. 할머니 명령을 지키느라 태어나서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던 패스트푸드와 콜라였다. 수수하고 눈에 띄지 않아 그늘진 존재였다가 느닷없이 돌변하여 눈에 띄게 불량소녀가 되어갔다. 청춘을 빼앗은 할머니에게 어떤 형태로든 보복을 해야만 성이 풀렸고 동시에 잃어버린 청춘을 다시 한번 시작하고 싶어 한 마리 늑대같은 행동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 전문학교에 들어가면서 그 생활을 졸업했다. 한때는 할머니에게 반항하여 대필가라는 운명을 저주하기도 했지만 결국 포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모든 것이 싫어져서 해외로 방랑을 떠난 동안에도 돈이 떨어지면 미국 사람들에게 한자나 일본어를 써 주었다. 글씨 쓰기 재능이 포포를 구원해 준 것이다. '재주는 몸을 살린다'는 말을 인생에서 실감했다. 그때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감사했지만 이미 고맙다는 말을 전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쌍둥이 자매인 스시코 아주머니가 문구점을 맡아 주고 계셨다. 그러나 반년 전 스시코 아주머니도 세상을 떠나자 가마쿠라로 돌아와 츠바키 문구점을 이어받았다. 외국에서 사는 동안 대필을 해야겠다는 각오가 조금씩 굳어지기도 했다.
맨 첫 작품은 우오후쿠 생선 가게 아주머니의 서중(여름) 안부 엽서였다. 몇십 년째 맡아해 온 단골손님이다. 처서까지는 장마 안부, 입추까지는 서중 안부, 그걸 지나면 늦더위 안부를 묻는다. 내용은 간단하지만 숫자가 많은 큼직한 대필 의뢰이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대필 의뢰가 이어졌다. 쓰나다 씨 부인 댁 원숭이 곤노스케 군 조의문, 이혼 보고 편지, 옛날 이성 소꿉친구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 돈 빌려 달라는 친구의 청을 거절하는 편지, 시어머니 환갑을 축하하는 카드 연하장, 돌아가신 아버지가 치매 걸린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짜 편지, 용서할 수 없는 거짓말을 한 여우 같은 친구와 인연을 끊으려는 편지, 집요하게 심술부리는 다도 선생님에게 보내는 절연장 등이다.
대필 의뢰를 받으면 '빙의'라는 낱말로 표현되듯 완전히 의뢰인의 몸과 마음이 되어 편지의 내용은 물론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글씨체 선택, 편지지의 색깔과 재질 결정, 필기도구 선정 등의 작업에 들어간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도 있지만 마치 산고를 치르듯 고통을 겪기도 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께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를 한 통 써 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받았을 때이다. 거의 반 달 가량 고민하며 그 내용을 표현할 글씨체를 찾기 위해 용을 썼다. 커피숍에서 혼자 창 밖을 내다보던 어느 한순간 마침내 그 사람의 글씨가 포포의 손가락 끝에서 쏟아질 듯 몸부림칠 때 커피숍 전표로 쓰는 이면지 종이 다발과 볼펜을 얻어 왼손으로 천국에서 온 러브레터를 써 내려 갔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자기를 완전히 내려놓고 의뢰인의 입장이 되어 그 상황과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철저한 '비움'의 작업이 선행된다.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대필가의 길로 일상을 영위하며 포포는 이웃과 연결되고 조금씩 함께하는 삶의 즐거움도 맛본다. 담장 너머 바로 옆집에 홀로 사는 바바라 할머니와 일상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그 댁에 초청받아온 10여 명의 동네 이웃들과 벚꽃 놀이를 즐긴다. 음력설에는 여러모로 보살펴 주는 남작과 함께 넷이서 가마쿠라 알프스의 하이킹 코스를 걸어 산을 넘는 칠복신 순례를 하며 재밌는 추억을 남긴다. 그러한 일상 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출생과 양육 과정에서 겪은 상처를 조금씩 치유받기도 한다.
할머니가 펜팔로 사귀었던 이탈리아의 일본 여인이 돌려보낸 할머니의 편지를 읽게 된 것이 상처 투성이인 할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전환점이 된다. 그 편지 속에는 엄하고도 엄했던 할머니의 가면 아래 혼자 악전고투하며 손녀 걱정에 고민하고 상처 입고 슬퍼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할머니의 약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123 통에 달하는 모든 편지에 반드시 포포가 등장해 있었다. 눈물로 글씨가 번지고 흐트러져서 할머니가 쓴 글씨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엄하게 대하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셨던 할머니의 포포를 향한 사랑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랑만이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또 다른 사랑을 낳는가 보다. 포포는 뜻밖의 사고로 아내를 잃고 혼자서 카레 가게를 운영하며 어린 딸 큐피를 양육하는 모리카게 씨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할머니와의 소통을 위해 할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주후쿠사에서 정원의 경치를 더 잘 보여 주기 위해 등에 업은 포포를 추스르며 돌길을 걷던 할머니를 기억해내며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쓴다. 할머니처럼 대필가로 살아갈 것이라고 보고 드리며 모리카게 씨와 결혼하여 할머니가 자신을 키워 주었듯이 자신도 남의 아이인 큐피를 키울 것이라는 결심도 알려드린다. 어딘가 살아 계실 어머니에게도 편지를 쓰겠다는 생각을 한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하기보다 지금 손에 남은 것을 소중히 하는 게 좋다는 깨달음도 고백한다.
생계를 이어가는 대필 작업을 통해서, 할머니의 편지를 통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거나 자신의 편지를 쓰면서 '편지'라는 매개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받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소설이다. 편지의 선한 영향력을 아름답게 그렸다.
아침마다 불단에 손 모으기, 편지 무덤인 문총에 새 물 갈아 올리기 등 매일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과 연말 대청소, 문총 편지 공양, 연하장 행사 등 맡은 직무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정성껏 최선을 다하는 포포의 정갈한 삶의 모습이 치유와 평화의 선물을 전해 준다. 주어진 이 모든 길을, 이 모든 시간을 사랑할 때 주어지는 따뜻한 선물이다.
2019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