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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Dec 17. 2023

낯선 일상

허허로운 자리

 저물어 가는 가을의 끝자락, 11월은 만물이 얼어붙는 겨울의 초입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유채색의 생명에서 무채색인 죽음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달이다.

 스산하다.

 그래서일까?

 가톨릭에서는 11월 한 달을 위령성월로 지낸다.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을 시작으로 다음날인 11월 2일은 위령의 날,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이다.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용히 묵상하는 은총의 라고 가르친다.

 고해성사를 보고 오전 10시 합동 위령 미사를 봉헌했다. 성당을 나와 도보 30분 거리의 길을 걸어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향했다.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넓은 묘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잘 닦여 있는 긴 산책로. 가을이면 노랗게 은행잎으로 뒤덮이고 겨울이면 하얀 눈으로 갈아입는다.

 10여 년 간 남편과 심심찮게 드나들었던 곳, 적막한 평화와 인적 드문 고요와 오래된 자연이 좋았던 곳이다. 뒤로 해서 쪽문을 나서면 서달산 둘레길이 이어진다. 왼쪽으로 향하면 이수역 남성재래시장,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중앙대학교 뒷문에 도착한다. 둘이서 먹거리 챙겨가며 긴 시간 함께 걷거나 손주들을 승용차에 태워 철 따라 드나들었던 낯익은 곳이다.

 구석구석 키 큰 남편의 서늘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오늘은 바로 충혼탑으로 향했다.

 이곳에도 번 같이 들렀지.

 볼 때마다 가슴 찡하게 와닿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


 향을 피우고 잠시 묵념을 드렸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길 바라면서.

 바로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지하 호국영령 무명용사 봉안실로 내려갔다. 정면에 英顯昇天像이 우뚝 서 있다. 죽은 자의 말없음과 산 자의 비통한 슬픔, 그들 모두의 하늘을 향한 애절한 간구가 조각되어 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 아내, 자녀, 친지, 친구들의 뜨거운 눈물과 애통한 마음이 저 앞에서 뿌려지고 무너져 내렸을까? 그들이 남겨 놓았을 만 가지 쓰라린 사연들이 정갈한 공간 속을 떠돌고 있는 듯하다.

 간혹 서너 명의 방문객들이 잠깐씩 들고날 뿐 밝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주위는 고요하고 맑다. 죽은 자들의 구원을 간구하며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를 봉헌했다.

 위령성월 첫 팔일 간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님 기도 지향에 따른 기도를 바치고 묘지를 참배하고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면 연옥 영혼에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아웅다웅 50년을 함께했던 꿈같은 세월을 한순간에 바람 같이 나 보내고 이제 이렇게 떠나간 사람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사람으로 남았으니 주어진 몫을 말없이 조용히 해낼 뿐이다.

 어김없이 동반하는 가슴 저린 아픔은 홀로 견뎌내야 할 온전한 내 몫이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그립다는 말, 모든 힘든 짐들 다 내려놓고 아버지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히 평안하길 바란다는 말을 한없이 되뇌며 반복할 뿐이다.


 저녁나절, 허허로운 마음이 되어 발산동 사총사 형님들께 카톡 안부를 넣었다.


 ㅡ가을의 막바지, 언제 어디서나 제자리를 성실하게 잘 지키시는 형님들을 기억합니다.

 감사를 전하며 건강과 평화를 기도합니다.ㅡ


 M형님이 긴 답글을 보내오셨다.


 ㅡ시간을 잘 보내고 있습니다. 위령 성월은 하늘, 연옥, 지상의 통공의 달이라 지상에 있는 우리들의 기도로 돌아가신 선조들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특혜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11월은 가톨릭 모든 신자들에게는 바쁜 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삼사 년 전에 이 의무를 다 끝내었습니다. 저도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해, 전대사 전수를 위해 명동, 절두산 성지를 10여 년 다녔습니다.

 오늘날 와보니 신부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행동하며 다녔던 그때가 건강하고 좋았던 시절이었음을 감사합니다.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주어진 삶을 파도타기라도 하듯 아슬아슬 살아온 삶이 이제는 잔잔한 부둣가에 와닿았습니다. 인생의 끝자락이라는 평온한 쉼터. 하느님의 섭리에 굴복하며 감사라는 단어만 떠올립니다.


 베로니카, 남편의 영정을 성지에 모셨으니 자주 찾아갈 기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입니다. 열심히 찾아 추도하고 기도하다 보면 어느덧 하룻밤 일장춘몽 같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건강하게 주님 은총 속에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세 아우님들께 보내는 나의 짧은 회고력입니다.ㅡ


 80을 넘기고 작년부터는 고관절 통증으로 부쩍 걷기가 힘들어진 M형님. 기억하고 있고 함께했던 형님의 긴 시간과 성실했던 삶, 부쩍 약해져 버린 작은 몸이 글과 함께 눈에 선히 그려진다.


 2023년 11월 2일, 홀로 맞이한 첫 위령의 날.

 날씨는 포근했고 멈추어 있는 듯한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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