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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Feb 19. 2024

걸어온 길, 걸어갈 길

   치유여행

 치유 프로그램 후반부에 속하는 6회 차에는 1박 2일 여행이 준비되어 있었다.

 2023년 11월 8일 ~ 9일.

 신부님이 운전하시는 9인승 승합차 한 대와 봉사자들의 승용차 두 대로 신부님, 수녀님, 봉사자 다섯 명, 사별자 다섯 명, 모두 열두 명이 함께했다.


 다산 생태공원과 실학박물관, 마재성지, 능내역을 들렀다. 물과 나무가 아름다운 양평의 늦가을 오후는 고즈넉이 깊었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물결과 나뭇잎 떨어 버린 앙상한 가지의 키 큰 나무들, 깊고 깨끗한 생태공원 산책길, 그 위를 비추는 지는 해의 여린 햇살.

 낯선 사람들과 걷는 이 길에서 남편과 함께 걸었던 많은 길들이 떠올랐다.


 연애 시절, 부산역에서 출발하여 교통부를 지나 구포 다리를 건너 김해 작은 마을 논둑길까지 마주 잡은 두  깍지 껴 같은 한 포켓에 넣고 한없이 다정하게 걸었던 길고도 먼 길.

 신혼 시절, 함안역에서 시댁 본가까지 힘든 줄도 모르고 둘이 손 잡고 걸었던 한 시간 거리의 뽀얀 먼지 폴폴 날리는 울퉁불퉁 비포장 도로.

 잠든 아이들을 두고 새벽마다 둘이 오르던 동네 뒷산, 개화산, 우장산, 수명산, 서달산.

 무박 2일 설악산 대청봉 등반길. 캄캄한 새벽 산길을 헤드랜턴을 켜고 앞선 남편의 발자국만을 바라보며 숨차게 오르던 오색 약수길.

 산청에서 법계사를 지나 이어지던 지리산 천왕봉 가팔랐던 길.

 1주일에 세 번씩 투석 치료를 받고 계시는 어머님을 찾아 뵙고 상경하는 길에 잠시 들렀던 청송 주왕산 주선지. 점점 어두워지다 금세 캄캄해지는 울퉁불퉁 오솔길을 남편이 지니고 있던 조그만 손전등 불빛 하나에 의지해 씩씩하게 걸어 내려오던 잊지 못할 길. 그때도 남편은 희미하고 조그만 그 불빛이 내 발길을 밝히도록 내내 애를 썼지. 거의 다 내려온 순간 건전지가 다해 순식간에 깜깜해졌던 그 길, 넘치던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어둠 속에 단지 우리 둘밖에 없었던 으스스했던 그 산길.

 1996년 여름, 쏟아지는 빗속을 하염없이 둘이 걸어 내려왔던 한라산 백록담 하산길.

 목동에서 살던 시절, 주말마다 나섰던 삼성산 등반. 정상에서 팔고 있는 막걸리 한 잔 사 마시고 서울대 수목원을 거쳐 내려오던 아름다운 산길. 매년 하얀 목련과 연분홍 아련한 산벚꽃들이 흐드러지고 매번 나는 탄성을 내뱉었지.

 "아, 저것 좀 보세요."

 가을에는 후드득 떨어지는 알밤을 줍고 카페 주인장의 기타 연주를 들으며 따끈한 커피를 아껴 마셨던 수목원 길.

 귀향하여 2년 간 머물렀던 함안에서 구석구석 누비고 함께 다녔던 동서남북 둑길과 많기도 했던 둘레길과 논둑 밭둑길, 동네 골목길.

 2016년 봄, 보름 동안 머물렀던 LA 라브레아에서 이곳저곳 찾아다녔던 낯설고 흥미로웠던 길.

 2019년 가을, 함께 걸었던 유서 깊은 스페인 산티아고 길.

 40년 세월, 주일마다 함께 걸어 다녔던 성당 미사 봉헌 길.


 헤아려 보자면 끝도 없이 밀려오는 과거의 시간과 공간들. 그 순간 그 장면에 얽혀 있는 그와 나의 로애락, 그때 그 마음들.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앞으로 달려오기만 했던 풋풋했던 시간과 꽉 찬 공간들, 아옹다옹 티격태격하는 가운데서도 서로만을 바라보며 설레고 사랑했던 귀한 흔적들이다.

 '이렇게 우리가 걸어왔고 이렇게 내가 걸어가야 되는구나.'

 돌아보는 길과 내다보는 길이 아직은 눈물 속에 그 윤곽이 흐릿하다.


 숙소는 용문산 자연휴양림 속에 자리 잡은 2층 붉은 기와집이었다. 짐을 풀고 나서 신부님, 수녀님, 봉사자분들이 모두 우리 숙소로 건너오셨다. 두 편으로 나뉘어 윷놀이로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모두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고 한 공간에 남은 우리 다섯은 편안하게 누워서 밤 깊도록 결혼 생활 이야기, 투병 기간 이야기, 떠나보내고 난 뒤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짧은 만남이긴 하지만 특수한 성격으로 깊이 있게 이어진 모임이라 공감과 치유라는 목적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공기 맑은 깊은 산속에서 따뜻한 누룽지 국밥과 정갈한 집밥 반찬으로 정성 어린 아침 식사를 대접받았다. 봉사자들의 헌신이다.

 전망대까지 오르는 산길 산책, 늦가을 숲 속. 발 밑에 밟히는 낙엽들은 서리에 젖어 눅눅했고 싸아하니 감싸오는 공기는 차갑고 맑았다. 전망대의 잘 갖추어진 데크 위에서 멀리 산 아래 마을들을 내려다보며 늦가을 산속 아침에 잠시 머물렀다.

 자상하고 말솜씨 뛰어나신 신부님이 이 모임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여러 해에 걸친 준비 과정을 들려주셨다.

 ㅡ성모병원에서 일할 때였다. 사체 기증자의 유족들을 만날 일이 많았는데 그분들이 사별의 상실감으로 인해 너무 많이 슬퍼하시고 오랜동안 고통을 겪으시는 것을 보고 치유 프로그램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러 기관들의 협조와 협의를 거쳐 사랑마루 사별자 치유 모임을 시작했으며 여러분들이 그 4기 회원들이다.

 애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너무 오래, 너무 깊이 슬퍼하여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매몰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이다. 고인과의 이별에 함몰되어 현실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마음껏 슬퍼하며 그것을 표현해 내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확인받아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 일어설 충분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ㅡ


 그렇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목표는 분명하고 뚜렷하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음에 감사드리며 아직도 내가 사랑할 사람이 남아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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