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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26. 2024

퍼펙트 데이즈

2024년 가을

 일본 도쿄 시내, 시부야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인 60대 독신 남자, 히라야마의 잔잔한 일상을 그려 큰 감동을 준 영화 <퍼펙트 데이즈>.

주변 인물들에 비해 주인공의 비중이 아주 크다. 거의 모노드라마 수준으로 느껴진다.

 흥미 있는 주변 인물들이 짬짬이 나타나 변함없이 규칙적이고 잔잔한 주인공의 일상을 조금씩 흔들어 놓는다.  


 그중 한 명인 철부지 동료 청소부, 타카시. 사람 좋은 청년이다. 샛노란 염색 머리에 짧은 스커트 차림인 여자 친구 아야에게 폭 빠져 있다.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하지만 얇은 지갑 사정 때문에 여의치 않다.

 그가 반발한다.

 "뭐, 이런 세상이 있어요? 돈 때문에 사랑을 못하다니, 어떻게 돈이 없어서 사랑하지 못하는 세상이 다 있나요?"  

 여자의 마음을 살 절호의 기회를 잡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이 없다. 여간 애가 타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 히라야마에게 도움을 청한다. 히라야마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갑을 털어 그의 손에 쥐어 준다.


 순수한 청년 타카시, 그는 그 나름으로 돈이 없어도 되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화장실 청소를 하는 동안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로 찾아와 그의 귀를 만지고 청소 작업에 방해되는 접근을 해오는 정신장애자의 모든 행동을 귀찮아하지 않고 다 받아준다. 사랑의 행위이다. 덩치 큰 정신지체자 청년은 그에게서 평화와 안정을 누린다. 그러나 청춘의 사랑을 주고받고 싶은 이성 상대자는 다르다. 돈을 들여야 한다. 그녀는 원하는 것이 많다.


 어느 날, 타카시는 자신의 직장인 화장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꼭 갚겠다고 장담하며 빌려갔던 히라야마의 돈도 갚지 않고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돈이 없어도 사랑할 수 있는 다른 상을 찾아낸 것일까?

 히라야마는 다른 청소부를 구할 때까지 두 사람 몫의 청소 구역을 감당해야 했다.


 돈 때문에 갈등하는 사랑에 대해 늘 안타까워하고 절망하는 어린 청춘을 보며 기형도의 시 <빈 집>이 생각났다. 고전과도 같은 그의 대표작, <빈 집>.     여러 번 암송하려고 욕심을 내 보았으나 매번 실패했다. 매력적인 시어들이 뒤죽박죽 얽히고설키며 순서를 놓쳐 버리곤 했다.

 지난봄에 들렀던 광명의 기형도 기념관에서 그의 불우했던 유년 시절과 긴 시간 빈곤했던 그의 가정환경을 자세히 알고 나니 <빈 집>에 깔린 절망의 정서가 한 편의 이야기가 되어 내게로 다가왔다.

 그의 또 다른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에 나오는 구절,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이 이 시의 주제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ㅡ음, 그렇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구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ㅡ그렇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너무도 짧지. 늘, 언제나ᆢ.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ㅡ가난 때문에 늘 마음이 추웠구나. 희망이 보장된 미래는 흐릿한 겨울 안갯속에 어둡게 가려져 있었구나.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ㅡ마치 앞길을 밝혀주기라도 할 듯, 축복하기라도 할 듯, 환하게 일렁거리던 촛불. 그 아래에서 간절한 사랑을 담은 편지들을 썼지. 그러나 마음 한편은 늘 어두웠지. 왠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었지.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ㅡ언제, 어느 때, 불쑥 얼굴 내밀지 모르는 이별, 결별의 선언. 내가 먼저 흰 종이 위에 써 내려갈까?아님 그대의 통보에 눈물로  응답하는 아픈 답장을 쓰게 될까?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랑, 언제라도 깨질 것 같은 사랑, 자신 없는 사랑. 계속 이어질까? 내가 먼저 끝낼까? 외로운 망설임 속에서 아픈 가슴을 적셔 내리던 뜨거운 눈물.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ㅡ아, 이제 그 두근거렸던 분홍빛 소망은 절망으로 끝나고 말았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ㅡ캄캄해진 내 청춘, 사라져 버린 포근함, 가만히 눈을 감고 나만의 동굴 속으로 침잠하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ㅡ그대가 사라져 버린 시간과 공간, 혼자가 되어 버린 차가운 이별, 희망과 꿈과 차오르던 기쁨이 모두 사라져 버린 공허. 그 속에서 텅 빈 껍데기가 되어버린 가엾은 내 사랑.



 아름답고 간절하게 다가왔지만 모호하게 갈피가 잡히지 않던 표현들이 한 편의 이야기로 엮어지면서 암송이 되었다. 번번이 시도했지만 처음으로 성공한 암송이다.

 오래 기억될 영화를 보고, 시집을 사고, 서정이 가득한 시 한 편을 외우게 된 날들, 나의 퍼펙트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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