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8월이다. 서울은 무더위 찜통이라고 연일 뉴스에서 알려 온다. 이곳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 어젯밤에도 작은방에서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 덕분에 선풍기 없이도 잘 수 있었다.
새벽 5시. 남편의 핸드폰에서 알람 음악이 나온다. 일어나 샌드위치 4인분을 만들었다. 통밀가루 식빵 두 쪽씩에다 달콤한 블루베리 잼과 새콤 달착지근한 샌드위치 소스를 두툼하게 바르고 가운데에는 달걀 프라이, 치즈, 그리고 야채로는 시골집에서 수확한 상치, 토마토, 부추, 깻잎 등을 듬뿍 눌러 넣었다. 투명 랩으로 똘똘 감아 포장을 마무리했다. 퇴비 거름 무더기에 버리려고 이틀 동안 모아둔 음식물 쓰레기도 챙겼다.
승용차로 출발하니 딱 5분 만에 춘곡 집에 도착했다. 마산에서 출발하여 우리보다 일찍 도착해 있는 큰시누 부부랑 커피, 우유를 곁들여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베테랑 농부인 큰시누 부부는 말없이도 알아서 척척 밭일을 해내고 남편이랑 나는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거드는 시늉을 한다. 오늘 남편은 감나무 가지 죽은 것들을 쳐내고 나는 밭고랑 사이의 잡초를 맡았다. 아버님 때부터 사용해 오던 농기구들이 텃밭 한 귀퉁이, 옛날 돼지우리로 쓰던 낡은 헛간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걸쳐 놓은 대나무 막대에 호미만도 서너 종류로 열댓 개 조르르 걸려 있다. 날이 좁고 가느다란 호미를 골라 들었다. 워낙 부지런한 큰시누 부부인지라 별로 자라나 있는 풀도 없다. 잔잔하게 이제 막 싹터 나오는 풀들을 눈에 띄는 대로 뽑아내니 밭이 한층 더 깨끗해졌다.
큰시누가 텃밭에서 거둔 노각, 풋고추, 가지, 여린 머위잎, 밭미나리, 돌나물, 상치, 토마토, 깻잎 등을 조금씩 나누어 담아 우리는 먼저 집으로 출발했다. 8시 40분. 오늘부터 시작하는 수영 강습이 10시에 있기 때문이다.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함안체육관. 함안 지방공사가 운영하며 앞으로는 함지공원, 옆으로는 공설 운동장, 뒤로는 연꽃 테마 파크가 펼쳐져 있는 넓은 자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1층 수영장은 북쪽과 동쪽, 남쪽, 세 면이 전면 유리창이다. 복도 쪽 남쪽 유리창으로는 젊은 엄마, 아빠들이 강습받는 자녀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동쪽 유리창으로는 높은 천정에서부터 아침 햇볕이 환하게 비춰 들고 북쪽 유리창 밖으로는 키 높고 잎사귀 무성한 활엽수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2층은 가끔 떠들썩한 에어로빅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헬스장이다.
수영장에는 여섯 개의 레인이 있는데 개 당 길이는 25m, 수심은 1.15M에서 시작하여 1.35M까지 점점 깊어진다. 6개 레인 중 한 개에는 자유 수영 (걷기 전용) 팻말이 놓여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강습과는 상관없이 본인들 맘 내키는 대로 물속에서 온갖 체조도 하시고 어릴 적 물 웅덩이에서 친구들과 놀았던 개헤엄으로 동동 떠다니기도 하신다. 일종의 수영장 경로 우대석이다. 65세 이상은 입장료도 반값이다. 1회 입장료 1650원, 한 달 사용료 2만 5천 원. 굽은 다리, 불거진 아랫배, 굵은 주름살, 그 아무것도 아무 상관하지 않고 여유만만, 각자 잘 놀고 계시는 모습들이 평화롭고 대견해 보여서 귀엽기까지 하다. 세월과 노동 앞에서 쭈구러든 외양이지만 몸과 마음이 한껏 축복받은 노인들이다.
샤워실도 한꺼번에 40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다. 모든 공간이 넓고 쾌적하다 보니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거나 뒷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서두를 일도 없다. 수영장 물도 깨끗하고 수영장을 오가는 둑길도 상쾌하다.
집을 나서서 아파트 단지들을 가로질러 사방이 툭 트인 둑길로 올라가면 기다리고 있던 시원한 바람이 한가득 품에 와 안긴다. 저 앞에는 밤이 되면 네온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멋진 나무다리, 공원교가 기다리고 있다. 짱짱한 여름 햇볕 아래 싱싱하게 자라는 예쁜 강아지풀들이 조그만 바람결에도 연연한 몸짓으로 살랑거리며 친구들보다 조금 큰 키를 자랑하고 둑 아래 하천 습지에서는 무성한 여름 풀들이 한없이 부드러운 초록 융단을 깔아놓고 있다. 드문드문 보이는 양귀비 꽃들의 새빨간 강렬함이 유독 도드라진다. 고혹적이다. 그 사이로 숨었다 드러났다 모습을 바꿔가며 유유히 흘러가는 하천물, 그리고 시원한 바람. 다리를 건너고 나무 계단을 내려와 넓은 모래 운동장을 옆에 끼고 체육관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사람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은 승용차나 자전거로 움직인다.
30여 년 전 허리 통증 치료차 집에서 꽤 먼 거리를 버스 타고 다니며 서너 달 수영 강습을 받은 적이 있다. 몸 움직이기에 게으르고 체력도 바닥인지라 금세 중도 하차했다. 바쁜 일상에 떠밀려 그 이후 계속 미뤄만 왔던 수영 강습. 한적한 귀향 생활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니 한결 여유롭다.
처음 뵙는 강사님의 평이 날카롭다.
"몸은 기억을 하고 있지만 연결이 잘 되지 않고 체력이 부족합니다."
"천천히, 편안하게 하셔요."
천천히 즐기며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워 물에다 나를 맡겨 보리라. 채 열 명이 안 되는 초급반 수강생들의 줄 맨 끝에서 그럭저럭 헥헥거리며 강습을 마쳤다.
집에 돌아오니 11시 40분. 갈비탕 점심을 먹기로 했다. 며칠 전 개업해서 내일까지 9천 원짜리 갈비탕을 7천 원에 홍보 판매한다는 집이다.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다. 이틀 전에는 큰시누 부부와 함께 저녁 7시에 갔더니 이미 준비해 둔 하루치 재료가 다 매진되었다고 해서 옆집인 감자탕 집으로 갔다.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을 피해 12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오늘도 손님들이 줄을 섰다. 포장용 주문 갈비탕도 카운터 옆 의자에 계속 쌓인다. 빈자리가 하나 마련되었다. 우리도 4인분 포장 주문까지 했다. 내일이면 할인 행사가 끝나니 조만간 집에서 큰시누네랑 같이 먹을 몫이다.
집으로 와서는 영화 감상으로 피서를 했다. 나의 기호를 많이 염두에 둔 영화 선정과 TV 상영 조작은 남편 몫이다. 나는 혼자서는 TV를 건드리지 않는다. 실내온도 37도를 가리키는 제일 더운 오후 시간, 창문 열고 선풍기 바람 쐬며 TV로 며칠 새 좋은 영화들을 여러 편 보았다. <Me Before You> , < Bridge of Spies> , < Atonement > , <소피의 선택>, <천사와 악마> 등등. 오늘 영화는 <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번역된 <The Barber of Syberia>이다. 오래전 영화관에서 본 장면들이지만 새롭게 와닿는다. 우연히 엮인 운명적인 사랑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한스럽게 엇갈리는 안타까운 사연이다. 꿈과 다르게 펼쳐지는 현실. 2시간 남짓 시베리아의 멋진 풍경과 문화, 그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폭 빠져들어 있는 동안 가장 더운 낮시간이 지나갔다. 모두 좋은 영화들이었지만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소피의 선택>이 가장 많은 여운을 남긴다.
천천히 저녁을 준비했다. 깨끗이 씻은 여린 상치를 쏭쏭 채 썰어 큰 그릇 밑에 깔고 그 위에 갓 지은 뜨거운 동부콩 밥을 두어 주걱 퍼 담는다. 오이의 사촌으로 보이는 노각의 두꺼운 껍질을 감자칼로 벗겨내고 길이로 반 자른 다음 어슷 썰기로 총총 썰어 찧어 놓은 마늘을 듬뿍 넣고 기름 두른 달군 프라이 팬에서 후딱 볶아 밥 위에 얹고 매실 고추장, 참기름, 통깨, 구운 김가루를 올리면 비빔밥 완성이다. 붉은 풋고추와 하얀 양파를 채 썰고 한 옆에 살짝 막장을 곁들이면 밀가루 풀물 쑤어 담근 초록빛 돌나물 물김치가 국 노릇을 한다.
식사 후 해 떨어지기를 기다려 집을 나섰다. 7시 30분이나 되어야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해방된다. 오늘은 북쪽으로 뻗어 있는 둑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아파트 단지 뒤의 짧은 둑길을 거쳐 충의공원과 함안 고등학교 사이의 골목길을 지나 자동차 길을 건너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긴 둑길을 만난다. 시원하게 쑥쑥 자라 지천으로 피어 있는 달맞이 꽃들과 온 둑을 덮고 있는 칡넝쿨들, 둑 밑 습지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싱싱한 풀들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시원한 바람에 흔들리며 강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사방 어느 한 곳도 막힘이 없이 뚫려 있는 하늘, 겹겹이 빙 둘러쳐진 먼 산들의 평화로운 능선 위에서는 점점 밤으로 가라앉는 석양이 온갖 다양한 빛의 향연을 벌인다. 눈길 가는 곳마다 다르게 채색된 구름들이 유유히 우아하게 그 자태를 뽐낸다. 점점 어둑해지는 둑길,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하나, 둘, 깨어나는 앙증맞은 별들이 또다시 하늘을 쳐다보게 만든다. 여기도 별, 저기도 별, 그리고 날마다 조금씩 다른 몸매를 보여주는 달. 하늘은 크고 작은 별들의 영롱한 빛으로 가득 찬다.
쾌적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들어서면 등을 흠뻑 적신 땀을 차가운 수돗물로 씻어내고 지나간 <인간극장> 프로를 한 편씩 찾아본다. 억척스러운 육체노동으로 온갖 농사일들을 혼자 떠맡아 장사까지 해가며 평생을 가족을 위해 헌신 봉사해 온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많다. 몸에 밴 근검, 절약, 희생, 봉사, 사랑. 자기 성찰이나 독서 따위는 꿈도 꾸어보지 못했지만 정말 뜨겁고도 아름답게 주어진 자신의 삶을 잘 살아오신 분들이다.
그분들이 묵묵히 살아내며 보여주는 겸손과 헌신과 사랑의 삶에 나의 삶을 한번 비추어 본다. 감사와 헌신이 많이 부족한 나의 삶. 다행히 아직도 시간은 이렇게 주어져 있구나.
새로운 환경, 함안에서의 보름째 날인 뜨거운 여름 하루가 이렇게 지나간다.
2018년 8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