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축복이 되는 형제 자매 관계

풍요로운 노년

by 서무아

이사를 한 지 한 달 열흘 뒤인 1월 12일. 맨 처음 집들이 초대 손님은 큰오빠네 부부와 딸, 아들, 외손녀, 막내 남동생, 이렇게 친정 식구 여섯 명이었다. 나까지 일곱 명. 작은 언니랑 여동생은 거리가 멀어서, 또 바쁜 일정으로 함께하지 못했다.

1936년생, 91세이신 큰오빠와 86세이신 올케언니 부부는 이제 자녀들의 도움 없이는 멀리 나다니지 못하신다. 그래도 혼자 걸으시고 식사와 대화를 함께할 수 있으니 두 분께 감사드린다.


누군가 말했다. 욕조에 물이 가득 담겨 있을 때 바닥의 배수 꼭지를 빼면 처음에는 물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줄어드는 듯하나 막바지에 이르면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다 빠져나가 버린다고. 우리 인생에 주어진 시간도 그러하다. 어릴 때는 한없이 늦게 흐르다 노년이 깊어갈수록 그 속도가 휘리릭 빨라진다. 한 해 한 해 달라지는 두 분 모습이 짠하다. 함께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더욱 귀하다.


이틀에 걸쳐 이것저것 음식을 장만하고 대청소를 했다.

조카의 안내를 받으며 환하게 들어오시는 오빠와 언니. 언니는 그 연세에 또 밑반찬까지 만들어 오셨다. 평생 익혀 온 깊은 손맛으로 만들어 온 음식들. 나물 세 가지, 푹 익은 무 속에서 빨간 고춧가루 양념을 입고 있는 코다리찜. 집 근처 분양 받은 텃밭에서 손수 키운 달랑무로 담그셨다는 빨간 총각김치.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결혼을 하셨으니 언니 눈에는 내가 언제까지나 조그맣고 내성적인 꼬마 여자아이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뭔가를 챙겨 주신다.

멀리 단양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오는 남동생은 한참 뒤에야 도착했다.


큰오빠는 인지 능력이 온전하지는 않다. 하지만 묻는 말에는 항상 웃으시며 긍적적인 대답을 하신다.

잘 지낸다.

잘 먹는다.

괘안타.

느거 언니가 음식 솜씨가 좋다 아이가.


5년 전, 80평생을 넘게 사시던 고향 부산을 떠나 아들네 옆 경기도 구리시 다가구 주택으로 옮겨 오신 후 외출을 끊으셨다. 집현관 비밀번호,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들고 나는 일이 번잡스럽고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 탓이다. 그렇고 그런 집들이 블록을 이루어 빽빽이 자리 잡고 있는 낯선 동네길도 불안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들 얼굴을 알아 보맞잡은 손에 힘을 꼭 주며 말씀하신다.

" 고맙다. 고마워."


우리가 함안을 떠나기 직전인 2020년 봄, 조카랑 언니와 같이 함안집으로 오셔서 함께 나들이를 갔던 악양 생태공원. 강가로 나 있는 긴 데크길을 따라 악양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강의 지리적 생태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던 그 기억력과 언변은 감동적이었다. 역사와 자연, 사람을 좋아하시는 오빠다웠다.


2년 전 이맘때였다. 초기 치매가 진행되면서 가족 간의 불화가 일어나 큰조카가 급히 자기네 집으로 잠깐 아버지를 모셔온 모양이었다. 나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가 나를 찾으신다고.

오빠 집과 조카 집이 있는 구리로 바로 달려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받으신 오빠는 츄리닝 바지 차림으로 시계침이 멈춘 손목시계를 차고 계셨다.

나는 사들고 간 햄버거를 펼쳐 놓았다. 한참만에 오빠가 입을 떼셨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순발력 떨어지는 내가 한참 만에 말을 꺼냈다. 우리가 어릴 , 큰오빠가 7남매의 장남으로서 30대 청년이셨을 때, 60세가 채 안 되신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맡아 온 가장 역할에 대한 고마움을 얘기했다.

큰오빠 방 책장 작은 미닫이문 안쪽에 늘 붙어 있던 작은 오빠와 나의 기성회비 통지서.

내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을 때 통 크게 하시던 말씀.

"떨어져도 괘안타. 재수하면 된다."


1970년대 초, 친척과 이웃들은 딸아이 대학 왜 보내냐고, 여상 나와서 돈 벌면 될 텐데 왜 인문계 고등학교를 보냈냐고 뒤에서 쑥덕거리던 시절이다.

엄마의 희생과 헌신, 무조건적인 지원. 큰오빠와 큰언니 도움으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

오빠가 쓰시기 쉽게 1만 원 짜리 50장을 넣은 봉투를 오빠 포켓에 넣어 드리고 조카에게는 시계수리를 부탁하고 집을 나왔다.

오빠는 집으로 잘 들어가시고 모두 평온을 되찾았다.


1960년대 말, 세상 물정 모르시는 30대의 큰오빠는 커다란 경제적 이권이 달려 있는 사건에 뛰어들었다. 역부족이었다. 법정에도 섰다. 결국 내가 태어나 15년을 살았던 마당 넓은 집을 팔았다.

엄마는 집 판 돈을 허리에 둘러 감고 천금 같은 장남의 구명을 위해 새벽 기차로 대구에 있는 고등법원 부산재판부 사건 담당 판사집을 찾아다니셨다.

분가하여 오빠와 함께 주류 도매상과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올케언니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 무게는 평생을 갔다. 솜씨 좋고 훤칠한 큰올케 언니. 많은 사람들이 언니를 좋아했고 언니는 시원시원 잘 웃으셨다.


자라면서 올케언니에게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있다.

"뜯어가는 사람만 없어도 살겠다."

친척들 앞에서, 이웃들 앞에서, 우리들 앞에서 이 말을 수 없이 반복했다. 뜯어가는 사람은 당연히 옹기종기 어린 우리 네 남매와 엄마였다. 그 시원시원한, 활짝 웃는 다정한 웃음은 시집식구들 앞에서는 잔뜩 굳은 짜증으로 일변했다. 무력한 우리들은 철없는 가해자가 되어 숨을 죽였다.


방학 때면 엄마의 권유로 올케언니네 식당으로 가 잔 심부름을 도와드리곤 했다. 방학 한 달 간 밤늦게까지 열심히 성실히 언니 옆에서 자잘한 일들을 도왔다. 그때 받았던 적지 않은 홀대와 냉대, 서러웠던 기억들도 이제는 모두들 최선을 다했던, 어려웠던 시간으로 정리되고 수용되었지만 어두운 시절이었다.


낯선 서울로 올라오셨지만 활달하신 올케언니는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다. 그 나이로 주민센터를 찾아다니며 노인 일자리를 구하시고 며느리가 다니는 교회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으셨다. 성경을 읽으시고 한자급수시험에 도전하신다. 2년 전에는 컴퓨터로 노인 요양보호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셨다. 83세 최고령 합격자.

합격과 동시에 장애등급이 있는 큰오빠의 돌보미가 되어 정부에서 주는 요양사 월급을 받으신다. 약을 꼭꼭 챙겨 드리고 짧은 외출을 함께하고 화투 놀이를 하신다. 매일 담당자에게 보고도 해야 된다.


얼마 전부터는 집에서 5분 거리에 생긴 경로당에 같이 다니신다고 한다. 그곳에서 점심밥 한 끼를 해결하니 얼마나 편안해졌는지 모른다고 기뻐하시는 걸 보니 정말 다행이다.

한 달 이용료는 1인 당 1만 원, 1년치는 10만 원.


같이 식사를 하고 새 집을 구경하면서 올케 언니는 무척 기뻐하신다. 몇 번이나 꼭 껴안아 주신다.

"고모야, 정말 잘했다. 정말 고맙다. 이렇게 사니 얼마나 좋노? 그동안 형제들을 끝없이 도왔으니 복을 받은 기라."

진심 어린 격려와 기쁨을 나누어 주시는 모습에서 나이가 주는 풍요로움, 잘 살아오신 지혜가 느껴진다.


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거두고, 많이 어두워진 길을 아들 딸과 함께 나서시는 두 분. 1년치 경로당 회비를 넣은 봉투를 각각 두 손에 쥐어 드렸다. 지금처럼 이렇게 지내시기만 하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구정 지나 정월 대보름 다음날이 오빠 생신이니 그때는 내가 또 찾아가 뵈어야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을 받아들이며 지나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많은 부분에 감사하며 기억하는 중요한 일을 할 시간.

그 시간이 우리에게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