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 열차 여행

2026년 2월 2일 월요일

by 서무아

눈꽃 열차 여행~!

생각 주머니는 어느새 멀리 러시아의 끝없는 눈 벌판, 하나의 점으로 변해 사라지는 무정한 눈썰매를 향해 날아간다. 살아생전 다시는 못 만날 라라와 지바고의 마지막 이별. 가물가물, 애틋한 눈으로 수많은 사연을 말하는 라라를 태운 눈썰매는 멀어져 가고 금세라도 피눈물을 쏟아낼 듯 빨갛게 충혈되어 가던 지바고의 애절한 눈망울만 화면 가득 떠오른다. 황급히 올라간 2층 계단참에서 다급하게 내리쳐 깨뜨린 창문. 눈썰매는 한 점 그림자로 사라지고 창문 밖 가득 펼쳐지던 아득한 눈밭.


올해 서울은 눈이 많은 겨울은 아니었다. 여느 해라면 길가 한 귀퉁이 담 쪽으로 겨우내 쌓여 있었을 커다란 흰 눈덩이들이 자취를 감춘 채 이미 겨울 한 철을 거의 다 보내고 있었다.


2026년 2월 2일 월요일

B가 주선하여 어렵게 구한 코레일 여행 상품 기차표 석 장으로 J와 나, 셋이 눈꽃 열차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해 연말, 우리 셋은 앞으로 2년 간 여고 동기 동창회를 이끌어 갈 새 임원진이 되었다. 회장에 선출된 B의 요청으로 지난 2년에 이어 내가 다시 총무를 맡게 되었다. 회계를 맡은 J.

이번 여행은 우리 셋의 단합 대회인 셈이다.

B의 강력한 추진력과 뜨거운 열성으로 이루어진 여행이다. 기차표 일정을 보내왔다.


청량리 07:05 출발

정동진 08:58 도착

1시간 42분 후

정동진 10:30 출발

분천 13:09 도착

3시간 51분 후

분천 17:00 출발

영주 18:01 도착

28분 후

영주 18:29 출발

청량리 20:15 도착


청량리역에서 아침 7시 5분에 출발하는 눈꽃 열차를 타야 한다. 6시 50분 이전에 청량리역에 도착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지하철 종결자 앱 도움을 받아 집에서 청량리까지의 전철 환승 노선표를 작성했다. 새벽과 낮, 밤의 전철 배차 시간 간격이 시간대에 따라 다르고 경우에 따라 환승 노선도 달라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집에서 새벽 첫차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 차를 놓치면 눈꽃열차도 안녕이다.


7호선 내방역 석남행 5시 43분 승차

4호선 총신대역 불암산행 5시 54분 환승

1호선 서울역 광운대행 6시 3분 환승

청량리역 6시 32분 도착


혹한에 대비해야 한다는 AI의 충고를 참조해 이런저런 준비물들을 챙겼다. 새벽 4시 30분에 알람을 설정해 두고 잠자리에 들려하니 어느새 11시를 훌쩍 넘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다. 핸드폰 화면 한 귀퉁이에는 밤새 눈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예보가 떠 있었다.


과연 새벽 창밖 풍경은 흰색으로 가득했다. 아파트 정원의 나무 위에도, 근처 집들의 낮은 지붕 위에도, 드문드문 차들이 다니는 새벽 차도 위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귀한 눈을 밟고 눈꽃 열차를 타러 가는 행운을 만났다. 정해진 노선대로 차분히 환승해 가며 도착한 청량리역.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도착한 할머니 셋. 큰 실수 없이 드디어 정해진 열차 좌석에 자리 잡았다. 은근히 졸였던 마음도 내려놓았다.



차창 밖으로 눈 내린 겨울의 산과 들을 내다보는 평온함, 작은 목소리로 오손도손 친구와 정담을 나누는 따스함, 겨울 기차 여행의 낭만이 무르익었다.



두 시간 만에 도착한 정동진. 1970 ~1980년대 한국의 격변기를 보여준 1995년 송지나 작가의 SBS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으로 엄청난 유명세를 탄 곳. 신년맞이 일출 관광지로도 유명하지만 나는 처음이다. 기차역이 바로 넓은 바닷가 모래사장 위여서 깜짝 놀랐다. 시멘트 바닥 위에서 한 발짝만 내려서면 넓고 깨끗한 모래가 발 밑에 펼쳐졌다.

눈앞 가득 넘실대는 파도, 멀리서 가까이로 끝없이 다가오는 파도 소리, 저 멀리 아득한 곳 수평선 위로 무심한 듯 갈라지는 하늘과 바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 분천. 조그만 시골, 한적한 마을에 산타마을을 만들어 놓아 휴일과 명절 연휴에는 가족 나들이 인파가 대단하다고 했지만 그날은 우리 세 명과 또 다른 여자 친구 모임인 네 사람뿐이었다. 사람 보기가 어려웠다. B가 찜해 두었던 맛집은 월요일이라 휴업이었지만 영업 중인 바로 역 앞 식당도 괜찮았다.

인적 없는 시골마을 골목길을 이곳저곳 둘러보다 발견한 팻말, *낙동강 세평 하늘길*

길 양옆으로 눈 내린 풍경을 끼고 깨끗하고 아늑한 길이 한없이 뻗어 있었다. 남은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있는 데까지 걸어 보기로 했다. 허리를 아껴야 하는 J는 남고 길에는 B와 나 둘 뿐이었다. 마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낯선 트레킹을 하는 듯 색다른 느낌이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영주. 28분 머무는 잠깐 동안 대합실 밖으로 나갔다. 발아래로 펼쳐지는 영주 시내의 점점 어두워지는 길을 밝히는 네온사인들과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불빛을 구경하였다. 기온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부석사로 오르는 고즈넉한 산길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부석사에서 내려다보는 먼 앞산의 정취는 다음 여행 일정의 목표가 되었다.


다시 청량리를 거쳐 집에 도착한 시간은 밤 9시 15분. B의 수고와 J의 동참으로 알찬 하루 여행길이 추억 창고에 소중히 저장되었다. 언제까지나 선명히 반짝이는 귀한 보석으로 간직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