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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ug 04. 2021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초등학교가 여름방학을 했다. 항상 일복이 넘치는 사위랑 딸은 둘 다 재택근무 중이다. 종일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한다. 초등 2, 3학년 두 외손주들의 등교는 코로나로 인해 1학기 내내 불안 불안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2학년은 주 5일, 3학년은 주 3일 등교를 이어갔다. 점심을 학교에서 먹고 오는 등교일이 엄마들에게는 구세주였다. 일에 파묻혀 지내는 남편들도 출근을 할 때면 아침은 대강, 그리고 점심, 저녁 두 끼는 밖에서 해결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제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에서 방학이 되니 네 식구의 세 끼 식사가 완전 집밥 과제가 되어버렸다.


 하루 종일 이구석 저구석 찾아다니며 어질르고 계속 엄마를 불러대는 아이들, 꼬박꼬박 찾아오는 식사 시간. 딸의 스트레스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사위와의 분위기까지도 팍팍해지는 듯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하루라도 손주들을 맡아 주고 싶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수술을 마친 남편이 재활 요양병원에 머무는 동안 두 녀석을 데려와 하룻밤 재워야지. 학원 수업이 없는 수요일이 좋겠다기에 화요일 저녁에 우리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아무리 더운 한여름이지만 도보로 한 시간쯤 걸리는 둘레길 걷기 코스를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름하여 여름방학 극기훈련. 학원 가는 일 아니면 하루 종일 온 집안을 통통거리고 다니며 어질러대는 녀석들이다. 아파트 5층에 살면서 아래층의 층간 소음 항의로 딸이 많이 힘들어했다. 다행히 보다 못한 시어른들께서 가까이 당신들이 사시던 1층 넓은 빌라 주택과 바꿔주셔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 힘든 코로나 시절에 얼마나 고맙고도 다행한 일인지. '부모'라는 비빌 언덕이 있는 복된 자녀들이다.


 지난번에도 손주들과 이 길을 한 번 걸어본 적이 있다. 서래마을에 있는 고급 제빵집의 마카롱과 치즈와 초콜릿을 미끼로 내걸고 두 녀석들을 뒤에서 몰아가며 방배역에서 시작하여 국립도서관까지 오는 서리풀 둘레길을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 자기들이 고른 맛있는 치즈랑 빵을 저녁으로 먹으면서 초등 2, 둘째 손주 녀석이 의젓하니 어른스러운 말을 해서 나를 웃겼다.


 "이런 일도 한 번쯤 해 볼 만하네요."


  5개월 전 일이다.


 '이번에도 잘 걷겠지. '


 오늘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삼복더위 한여름. 딸과 사위의 걱정이 앞선다.


 "어머니 힘드실 텐데요."


 "그래도 Go~~!! "


 다행히 두 녀석들이 선뜻 따라나선다. 시간은 해 질 녘을 택했다. 5시 반. 하지만 아직 바깥 기온은 한낮과 비슷하다. 푹푹 찐다.  애지중지, 한 순간도 떨어지지 못하는 인형들과 잠옷을 챙긴 가방을 들고 두 녀석 뒤에서 방향을 잡아주며 산길로 들어섰다.


 푸르른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여름 산. 짙은 녹음. 흙을 밟을 수 있는 오솔길. 온갖 살아 있는 생명들이 내뱉는 자연의 소리. 시원한 바람.


 "아, 예쁘다, 좋다, 시원하지?"


 세뇌공작을 위한 감탄사로 격려해 가며 여름 산길을 걷는다. 금세 하얗던 두 녀석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머리카락도 땀에 젖기 시작한다. 오르막은 징징거리다가 내리막길에서는 냅다 달리려는 손자 녀석을 견제하기 바쁘다. 일부러 어려운 낱말도 섞어 본다.


 "오르막길에서는 뛰어도 되지만 내리막에서는 뛰면 안 돼. 큰일 나. 가속도가 붙고 관성 법칙이 있어서 멈추고 싶어도 맘대로 못 서."


  잠시 멈칫하지만 이내 아홉 살짜리 남자아이의 생명력 넘치는 두 다리는 다시 새털처럼 가볍게 날아오른다.


 "다치면 여름 방학 내내 고생해. 내리막길은 뛰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어. 다치고 난 뒤에는 돌이킬 수 없어."


 끝없이 반복되는 말로 귀를 따갑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투정이 시작된다.


 "얼마나 더 가야 되나요?"


 "왜 이리 올라가는 길이 많아요?"


 "할머니, 이 오르막길 언제 끝나죠?"


 "언제 도착해요?"


 옆에 같이 가는 초등 3년, 1살 위 초긍정 누나가 점잖게 타이른다.


 "그렇게 힘들게 징징거리는 거 아니야. 열심히 다 걷고 나면 뿌듯할 걸."


 나도 보탠다.


 "징징거리거나 뿌듯해하는 건 선택이야. 네 마음이 주인이거든. 네가 감사 쪽에 힘을 실어 주면 네 마음이 '아, 뿌듯하다. 감사합니다' 할 걸."


 그 순간 바로 날아오는 볼멘 목소리.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으하하, 순발력 짱이다. 초등 1학년 때 미래 원소를 포함한 백여 개의 원소명과 원소기호가 나열된 원소 주기율표를 외워서 노래로 읊고 다닌 녀석이다. 암기한 도표를 삐뚤빼뚤 반복해서 여러 장 손으로 적어내기도 하고 일본어 사전 만든다고 하루 종일 매달리기도 한다. 남편 말에 의하면 자기는 평생 써도 못 쓴 양의 복사지를 이 녀석들은 6개월도 안 되어 다 쓴다.


 빨리 도착하고 싶은 욕심에 쉬지도 않고 한달음에 둘레길을 완파했다. 룰루랄라 이제는 파스타 집으로. 이중 유리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니 담박 달라지는 기온. 땀이 쏘옥 들어간다. 출입 명부를 작성하고 물을 찾는 두 녀석을 데리고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바로 입구에 레몬 조각을 띄운 차가운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셋이서 물부터 맛있게 꿀꺽꿀꺽. 메뉴를 주문하려 하니 다가온 직원이 가족 증명서 제시를 요구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 실시로 6시 이후에는 2명만이 동행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이상 인원은 가족 증명이 필요하다고. 시간은 이미 7시가 다 되어 있다.


 '할 수 없지, 뭐.'


 돌아서 나오면서 보니 유리에 비친 우리 셋의 모습이 땀에 폭 절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우습다. 1층 매장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빵을 골랐다. 바로 옆에 있는 마트에 들러 멜론도 사고 치즈도 골랐다. 아이스크림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으니 나도 모르는 척 넘어간다.


 드디어 집이다. 에어컨 가동 실시. 그리고 한 명씩 목욕탕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동생은 함께 목욕하고 싶어 하지만 누나는 질색이다. 동생이 양보하여 누나가 먼저 욕조를 이용했다. 이왕 하는 것. 충분히, 느긋하게, 물 온도도 물의 양도 본인 마음대로 정하기. 손으로 물때 벗기기 전과 물때 벗긴 후의 다른 감촉을 확인하고 흐뭇해하면서 머리를 감고 목욕을 끝내고 뽀송뽀송 잠옷으로 갈아입으니 인물들결 더 훤하다.


 냠냠 맛있게 각자가 고른 빵과 치즈와 멜론으로 저녁을 먹고 또다시 놀이로 들어간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둘이서 정말 잘 논다. 나는 땀에 젖은 빨래를 돌려 널고 뒷설거지를 했다. 오랜만에 빨랫대에 올망졸망, 울긋불긋 애들 옷이 걸렸다. 어느덧 11시를 넘었다.


 거실에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셋이 나란히 누웠다. 오늘 있었던 세 가지 좋은 일을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모범 답안 누나는 반듯한 말들을 하고 20개월 어린 동생도 의젓하게 감사 기도를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던 말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오늘 하루 산길을 잘 걸어서 뿌듯했습니다."


 이래서 또 한 번 웃는다. 예쁘고 예쁜 어린 새싹들이다. 뽀뽀, 뽀뽀, 뽀뽀. 

 

 이튿날, 아침 점심 저녁을 다 집밥 먹여서 저녁나절에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승용차로 데리러 오겠다는 사위의 청을 거절하고 마을버스로 갔다. 잠깐 졸던 손자가 얼마 안 가 내릴 시간에는 반짝 정신을 차리고 안전하게 하차했다. 고맙다.


 그다음 날 딸에게서 걸려온 전화.


 "엄마, 애들이 하루 만에 쑤욱 컸어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2121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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