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무아 Aug 15. 2021

 가재울 아파트 사용 설명서

   낯선 것에 익숙해지기

  예기치 않았던 인연으로 올 2월에 완공된 새 아파트로 6월 17일 이사를 왔다. 그리고 거의 석 달이 지나갔다. 낯설기만 한 서대문구 가재울 지역. 이 근처에서는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고 더구나 서울을 떠나 2년 동안 살았던 경남 함안에서 올라왔으니 더 낯설다.


 먼저 교통편을 보자면 15분 쯤 걷거나 버스를 타면 이용할 수 있는 가좌역, 경의 중앙선이 있고 집 앞에는 다양한 노선의 각종 버스들이 있다. 마음 먹고 2호선 홍대 입구 전철역 3번 출구까지 아예 걸어가기도 한다. 내 걸음으로 35분 정도 소요된다. 집을 나서서 홍제천을 따라가다 사천교에서 좌회전하면 경의선 숲길이 시작된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물길을 따라 제법 풍부한 수량의 맑은 물이 흘러가고 잘 뿌리내린 잔디와 각종 야생화들로 조성된 화단들이 곱다. 양 옆으로 아파트랑 1층을 상가로 개조한 2,3층 단독 주택들이 주욱 늘어서 있다. 지리적 특성상 젊은이들이 많다. 그들을 대상으로 아담한 카페, 옷집, 음식점 등이 문을 열고 있다. 키 큰 나무들도 많아 숲길이라는 이름이 그리 생뚱맞지는 않다. 용산 효창공원까지 이어지는 이 철도 숲길을 따라 30분쯤 더 걸어가면 5호선 공덕역이 나온다. 걷기 좋아하고 시간 많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코스다.

경의선 숲길

  아예 운동을 목표로 잡아 아파트에서 동북쪽으로 홍제천을 따라 35분 정도 올라가면 안산 자락길 진입구가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짙은 숲을 보유하고 있는 귀한 산, 안산. 말의 안장 모양으로 생겼대서 붙은 이름이다. 징검 다리를 건너 물레방아가 흘려보내는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자락길 입구에 들어선다. 산 중턱에 조성되어 있는 자락길에 이르기까지 잠깐 경사진 계단길을 오른다. 양 옆 둔덕에는 허브 종류의 야생화들을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았다. 봄이면 무리진 벗꽃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7킬로미터의 자락길은 편안한 흙길과 나무데크 길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하여 굳이 선글라스나 모자가 필요없을 정도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기상으로 쭉쭉 뻗은 메타세콰이아 숲도 경이롭다. 집에서 출발하여 귀가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3시간 반에서 4시간 정도다. 새벽에 일찍 눈 뜬 여름 아침, 조그만 물병 하나와 핸드폰과 이어폰만 챙기면 바로 출발한다. 참, 요즘은 마스크도 필수다. 한 모퉁이 돌 때마다 산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들이 다양하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눈에 들어오는 도심의 빼꼭한 아파트들과 남산 타워, 잠실 롯데월드 타워, 북한산, 관악산, 여의도 등 서울의 거의 모든 전망이 눈 아래 펼쳐진다. 혼자 걷는 사람들도 많다.

안산 자락길 무릇꽃

 안산과는 반대 방향인 한강 쪽으로 홍제천을 따라 30분 정도 걸으면 월드컵 공원이 나타난다. 호젓한 오솔길 바로 옆, 텅 비어 있는 넓은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 에너지 드림센터로 향하는 숲은 고즈넉하다. 좋은 숲이 이리 가까운 데 있구나. 조국의 울창한 나무와 숲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예쁘고 깨끗하게 가꾸어 놓은 정원들을 지나 에너지 드림센터를 거쳐 월드컵 축구 경기장 옆을 흐르는 불광천으로 내려간다. 불광천변을 따라 걷다가 증산3교에서 차도로 올라와 우리 아파트로 향한다. 총 소요 시간은 3시간 정도다. 바쁜 날은 월드컵 경기장과 마포 농수산물 센터 옆의 다리를 건너 마포구청을 지나 홍제천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면 2시간 거리다. 홍제천 맑은 물에는 어른 팔뚝만한 굵고 시커먼 잉어들이 떼지어 다니곤 한다. 하얀 백로도 잿빛 왜가리도 동동 무리지어 떠다니는 오리 가족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홍제천

  크게 마음 먹은 날은 하늘공원까지 둘러볼 수 있다. 300개 정도의 나무 계단을 올라 숲길을 지나면 펼쳐지는 억새 평원. 이미 곳곳에 억새가 피기 시작하고 있다. 아직은 싱싱하고 푸른 억새. 하늘 공원을 내려와 불광천으로 향하는 길에 왼쪽으로 보이는 문화 비축 기지. 석유 비축 탱크들이 변신한 문화 공간들을 둘러보고 넓은 야외 공간에 서 본다. 각종 공연과 인파로 왁자했던 과거의 그 활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코로나로 적막해진 곳. 그러나 그 뒤에 숨어 있는, 그 시절 그 순간을 수놓았던 사람들의 웃음과 밝았던 표정들이 아직도 허공에 생생히 살아 있는 듯하다.

하늘 공원

 즐겨 누리는 또 하나의 선물은 바로 아파트 단지 정원이다. 단지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원이다. 아파트 동들 사이사이 아낌없이 확보해 놓은 휴식 공간들. 대학에 조경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조경학과와 조경 설계학과가 있다고 들었는데 단지 안에 정말 멋진, 정원이 아닌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24시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고마운 공원이다. 아파트 사이에 녹지가 있다기보다 녹지 사이에 아파트가 있다고 표현한다면 너무 과장된 허풍일까? 승효상 건축가가 쓴 어느 글에서 좋은 동네는 꽃집과 골목길과 탁자가 갖추어진 의자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읽고 깊이 공감했던 적이 있다. 특히 탁자를 갖춘 의자는 멍청히 앉아 있는 벤치에 비해 뭔가 창조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그 글을 읽으며 감동 받았던 기억이 새로운데 곳곳에 넉넉하게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맘에 쏙 든다. 그냥 의자만 있는 곳도 많지만 구석구석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탁자를 갖춘 의자가 조용한 녹음 사이에 갖춰져 있다는 것이 기쁘다. 지금도 그 중 한 곳에 앉아 이 글을 쓴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청명한 바람 속에서 눈앞에 펼쳐진 초록의 정원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신축이다 보니 실내도 거의 완벽하다. 깔끔한 마무리로 정갈한 구석구석들. 수납이 넉넉한 부엌과 욕실과 붙박이장들. 햇빛 잘 드는 창. 필요하다 싶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전기코드부터 수도 꼭지에 이르기까지 편리하기 이를데없이 잘 지어 놓았다. 아파트 건축 실력이 뛰어나다.


 보너스로는 걸어서 채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정갈하고 예쁜 가재울 성당이 있고 바로 옆 아파트 단지에 실내 수영장을 갖춘 스포츠 센터도 있다. 코 앞의 대형 마트와 인근의 재래시장, 식자재 마트도 다양한 상품과 저렴한 가격으로 장보기에 편리하다.


승용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서오능의 호젓한 산책길도 빼놓을 수 없는 선물이다. 5백년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귀한 유적이다.


서오능 숲길

 이렇게 낯선 것에 익숙해진 지 석 달. 어쩔 수 없이 또 하나의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가구 1주택 실거주를 지향하는 정부의 강력한 주택 정책이 이곳에서의 한가로운 일상을 불안하게 한다. 주위의 여러 충고들을 참조하여 세입자가 이사를 가겠다는 우리집으로 다시 옮기기로 했다. 복잡하고 주거 비용 높고 낡고 오래된 반포 아파트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이유와 아이들 세 집과 가까워진다는 이유 때문이다. 내키지 않지만 또 무시할 수도 없기에 11월 중순까지 이곳과의 다섯 달의 인연을 끝낸다. 언젠가 다시 이곳으로 올 수 있을까? 꿈꾸어 보지만 꿈으로 끝나지 싶다. 함안을 떠나오면서 언젠가 다시 한번 돌아오리라, 잠시 품어 보았던 옅은 꿈처럼.


  2020년 9월 8일.


작가의 이전글 함안을 떠나던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