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함안 가야 5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코로나로 한 달 반 문을 닫았던 5일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휑하니 비어 있던 장터가 호객하는 상인들과 물건 고르는 손님들과 갖가지 상품들로 활기차다.
고기와 뼈가 수북이 쌓여 있는 정육점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햇양파, 가죽나물, 머위, 부추, 감자, 당근, 브로콜리, 대파, 쪽파 등 온갖 야채들도 즐비하고 조기, 고등어, 가자미, 고등어, 삼치, 조갯살 등이 풍성하게 소쿠리에 담겨 주인을 기다리는 어물전들도 주욱 길게 자리 잡았다.
사월인 오늘, 어물전 앞을 지나는 내 눈길은 빨간 멍게에 머문다.
그 옛날 어린 시절, 밥맛 없다고 투정 부리다 봄볕에 옹송거리고 앉아 있으면 입맛 올리는 데 좋다고 종종 엄마가 사 주시던 바로 그 멍게다.
소리 내며 골목길 지나가는 생선 장수 아주머니를 불러들여 흥정 끝에 멍게 한 대야를 사 들이신다. 부엌에서 칼과 도마를 내 와 우물가에서 멍게를 손질할 채비를 차리신다.
먼저 주둥이 부분을 썽둥 잘라 차가운 우물물에 슬쩍 헹궈내어 어머니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구경하고 있는 어린 우리들에게 차례차례 한쪽씩 나눠 주신다. 날름 받아 입 안에 넣으면 주둥이 부분에 조금 붙어 있던 향긋한 살의 달콤한 맛이 혀에 사르르 와닿는다. 살은 꼴깍 삼키고 질긴 주둥이 껍질은 꼭꼭 씹으며 거기에 배어 있는 멍게 향을 즐긴다. 씹힌 모습을 껌이라며 서로 꺼내 보여 줘 가면서.
어머니는 쓱싹쓱싹 거침없이 칼질을 하시고 우리는 쪼그리고 앉아 구경을 한다. 멍게의 속살과 껍데기 사이로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넣고 한 바퀴 비잉 돌리면 선명한 노랑과 주황의 싱싱한 속살이 떨어져 나온다. 그 살들을 뚝뚝 잘라 마치 우리 몸의 혈관처럼 여기저기 뻗어있는 검푸른 선을 칼로 따서 흙인지 찌꺼기인지 알 수 없는 내용물을 쭈욱 훑어낸다. 그리고는 맑은 물에 헹구어 초고추장에 툭툭 찍어 갓 돋아난 텃밭의 상치와 함께 맛나게 먹는다. 봄철 추억 음식의 대표 주자가 이 멍게다.
여름에는 커다란 꽃게를 한솥 가득 쪘다. 마당에 있는 평상 위에 게가 담긴 커다란 양은 대야가 놓이고 해진 후 어스름 저녁 시간에 온 식구가 둘러앉아 게를 발라 먹었다. 툭 쪼개어 등껍질에 붙어 있는 국물을 후루룩 쩝쩝 달게 마시고 배 부분의 생식기는 씹어서 단물 빨아먹고 뱉어내고 다리 살은 쇠젓가락으로 후벼 파고 밀어내어 알뜰살뜰 발라 먹었다. 수북이 쌓이던 껍데기들.
여름방학 때 고등학생이었던 작은오빠가 김해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얻어왔던 수박도 생각난다. 자전거 뒤에 꽁꽁 묶어온 수박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 칼을 대는 순간 바로 빨간 속살을 내보이며 파삭 쪼개져 버렸다. 그 깨진 조각들이 얼마나 싱싱하고 달콤했던지ᆢ.
19살 손위인 큰오빠가 퇴근길에 꼭 한 병씩 사 들고 오시던 초록 유리병 코카 콜라도 있다. 쇠로 된 병뚜껑을 툭 따서 온 식구가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차지도 않고 미지근하던 코카콜라. 하지만 그 이국적인 맛은 온도에 상관없이 매력적이었다.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간혹 콜라를 마실 때면 그때 그 시절 한 모금 맛보았던 그 맛이 그대로 살아난다.
아버지가 장남이셨던 '덕에' ㅡ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탓에'가 더 어울렸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일을 별로 겁내지 않는 분이셨다. 통 크게 척척 잘해 내셨다. 제사장 볼 돈 걱정하시는 것은 여러 번 보았지만 그것도 그리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ㅡ
한 달이 멀다 하고 준비해야 했던 제사상의 여러 음식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웃집에는 제사가 끝난 직후 밤에 음식을 돌리고 조금 떨어진 이웃집들에는 그 다음날 학교 가기 전 아침 나절 교복 차림으로 쟁반을 머리에 이고 제사 음식 배달 심부름을 먼저 다녀와야 했다.
제사를 앞두고 맨 먼저 엄마가 시작하시는 일은 콩나물시루 만드는 작업이었다. 방 한 귀퉁이에 낮은 물단지가 놓이고 나무 버팀목이 걸쳐지고 그 위에 콩나물 단지가 안쳐진다. 식구들 누구나 볼 때마다 옆에 놓여 있는 바가지로 물을 끼얹는다. 덮여있는 까만 보자기를 들치고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도 해 가며ᆢ.
제삿날 푸짐한 콩나물 접시가 되어 제사상에 오른다. 며칠 후면 먹다 남은 생선 대가리들과 부스러기 생선살들을 그 사이 더 길게 자라 잔뿌리가 무성해진 통통한 콩나물을 모두 뽑아 함께 섞어 넣고는 가마솥에서 푸욱 졸인다. 긴 나무 주걱으로 한두 번 저어가며 익히다 보면 가느다랗게 쪼그라든 콩나물에 달콤한 생선 맛이 배어들어 맛있는 콩나물 장조림이 되곤 했다.
추석 명절, 설 명절이 되면 가마솥에 뜨끈뜨끈한 찹쌀밥을 지어 뒷마당에 있는 돌절구에 쏟아 넣고 사촌 오빠들이랑 오빠들이 교대로 공이를 들어 올려 떡밥을 찧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물대접에 손 적셔가며 절구 옆으로 밀려 나오는 떡밥을 중앙으로 밀어 넣곤 하셨다. 공이를 들어 올리는 순간에 맞추어서 얼른 밀어 넣는 잽싼 손놀림이다. 얼추 다 이겨지면 준비된 노란 콩고물 위에 찰떡 반죽을 들어 옮겨 꾹꾹 눌러가며 넓게 펼친다. 반듯하게 모양을 다듬고 잘라내어 콩고물 찰떡을 만들었다. 고소하고 따뜻하며 씹히는 맛이 있는 그 시절의 콩고물 찰떡.
솔잎 깔아 놓은 솥에서 깨 넣고 콩 넣은 맵쌀 송편도 쪄내었다.
김장철,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평상 하나 가득 깨끗이 헹궈진 절임 배추와 하얗게 뽀득뽀득 씻긴 싱싱한 무 그리고 갖가지 양념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달큰한 굴 소쿠리도 빠지지 않았고 물에 불린 향긋한 청각과 하얀 뿌리와 초록 잎사귀가 싱싱한 대파와 어린 조기 새끼들도 동원되었다.
대식구가 한 겨울 내내 먹을 대용량의 김치가 차가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옆집 아주머니들이랑 부지런한 어머니의 손끝을 통해 뚝딱뚝딱 버무려져 마당 한 끝에 미리 파묻어 둔 장독 속에 차곡차곡 눌려 쌓였다. 차가운 날씨에 날이 어둑해져서야 일이 다 끝나곤 했다.
동짓날이면 쟁반 펼쳐놓고 둘러앉아 쌀가루로 하얘진 손바닥에 익반죽 가루 동글동글 두세 개씩 굴려가며 부지런히 만들어 내던 새알. 푹푹 끓어오르는 가마솥 팥죽에 우르르 새알 쏟아 넣어 손에 익은 긴 나무 주걱으로 이리저리 휘저으면 곧이어 하얗게 떠오르던 새알들. 시커먼 가마솥 밑으로 벌겋게 타오르던 불꽃.
곧이어 숨 죽은 그 불꽃 위에서 재빠른 어머니의 손길 아래 후딱후딱 구워지던 까만 김. 얌전하니 차르르 포개져 있던 까만 김이 어느새 바삭하니 구워져 우둘투둘 부풀어 오른 파란 김으로 변해 한 소쿠리 가득 수북이 쌓였다.
그다음은 석쇠 위에 놓인 말린 생선 차례이다. 잿빛으로 변해가는 불씨들을 부지깽이로 뒤적여 발간 속살들을 되살려가며 노르스럼 익혀내던 한겨울의 말린 생선들.
그리고는 한 대접 죽물 퍼담아 온 집을 빙 돌아가며 이곳저곳 뿌려대며 악귀를 몰아내는 주문을 외우시던 어머니. 벽에 흘러내린 팥물의 벌건 자국은 흐르는 시간 따라 점점 무채색으로 변해 가며 희미해졌다.
뜨끈한 팥죽에 곁들여지던 차가운 동치미. 그 맑은 국물 속에 잠겨 있는 하아얀 무와 파아란 무청의 선명한 색깔 대비.
설날이 되면 씻어 불린 쌀을 머리에 이고 가서는 방앗간 앞에서 오들오들 떨며 차례를 기다렸다. 쌀 대야는 어머니가 날라다 주셨지만 줄 서서 기다리는 당번은 우리 아이들의 몫이었다. 순서가 다 되어 하얀 가래떡이 따끈따끈 대야에 담기면 또 달려와 어머니께 고하면 어머니가 이고 돌아오셨다. 하루 24시간을 꼬빡 한 방 가득 펼쳐두고 뒤집어 가며 식히고 말린다. 건조 상태를 살피다 적당히 꾸덕해지면 다시 그 떡을 떡국거리로 써는 과정이 남아 있다. 언니들이랑 엄마랑 나까지 동원되어 동그마니 둘러앉아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또각또각 가래떡을 썰었다. 여린 손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큰 독 두 개 정도에 가득 찼다.
여기에 튀밥 강정도 추가된다.
'뻥이요~~!!' 할아버지 앞에 줄을 서서 순서가 될 때까지 내 차례를 기다린다. 몇 번씩 튀밥 터지는 소리에 귀를 막아가며. 이윽고 우리 튀밥이 완성되면 어머니가 자루 하나 가득 머리에 이고 돌아오신다.
큰 대야에 튀밥을 붓고 그 위에 뜨겁게 달인 조청을 뿌려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쓰윽쓱 골고루 버무린 다음 손으로 꼭꼭 쥐어 박상을 만들었다. 차가운 날씨에 금방 굳어진 박상을 단지에 차곡차곡 쟁여 담았다. 위의 것은 쉽게 꺼내 먹을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 점점 밑에 것을 먹어야 되면 박상은 자기들끼리 뭉쳐 단지 밑에 달라붙어 있다. 칼로 도려내다시피 해야 한다.
어머니는 뭐든 척척 잘해 내셨지만 어린 우리들은 커다란 부엌칼을 들고 장독간으로 가서 까치발로 큰 항아리 밑을 내려다보며 그걸 떼먹어 보려고 바둥거렸다.
보름날이 되면 또 한 번 음식이 마련된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오곡 찰밥과 파란 생미역 나물을 비롯한 각종 나물들.
또한 입시철이 되면 벽장 속에 몰래 마련해 놓고 나 혼자 한 줌씩 먹이시던 귀한 땅콩. 시장통을 지나가다 다른 식구들 몰래 나에게만 낱개로 한 개 사 주시던 입에 살살 녹는 귀한 바나나. 약단지에 폭폭 끓여 단지째 안겨 주시던 약병아리 곰탕. 수삼과 대추 달인 물.
결혼 후 친정에 내려가면 새로 이사해 비좁아진 부엌방에 배 깔고 드러누워 여닫이 샛문으로 구경만 하는 내 앞에서 부지런히 움직이시던 어머니. 그때도 이미 일흔에 가까운 연세였는데.
언젠가 한 번은 호박오가리 떡이 먹고 싶어 한 마디 타령을 흘렸다. 그다음 날 일어나 보니 어느새 따뜻하고 찰지고 달콤한 호박오가리 검정콩 찰떡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지나가듯 한 말을 어머니는 새겨들으신 것이다.
늘 바쁘고 활달하셨던 어머니는 새침데기 고학력자인 셋째 딸과 오손도손 정감 어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별로 없었지만 정성 담은 음식으로 까탈스러운 셋째 딸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하셨다.
출산 소식만 알려지면 온갖 일 다 제쳐놓고 한달음에 부산에서 서울로 득달같이 달려와 한솥 가득 미역국 끓여 주시던 어머니.
머리보다 팔다리를 먼저 움직이셨던 어머니와는 달리 팔다리는 묶어둔 채 머리만 쓰는 나.
우리 아이들은 나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음식이 과연 있기나 할지 궁금해진다.
2020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