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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ug 23. 2021

 부산 가야 공원과 에페소 성모 경당

 2002년 6월, 엄마가 세상을 떠나셨다.

 한참 시간이 지난 어느 날, 큰언니네 집에서 앨범을 같이 보게 되었다. 큰언니는 나보다 열네 살 많은 장녀이다 보니 가족들의 기억이 담긴 사진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한 명 한 명 잔뜩 멋 부려 꾸미고 사진관에서 찍은 명함판 사진, 여러 졸업식 입학식 사진, 동네분들이랑 여행 가서 한복 곱게 차려 입고 찍은 엄마 사진 등이 빛바랜 추억들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서로 기억을 더듬어가며 한 장 한 장, 사진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나누어 가다가 조그만 흑백 사진 한 장에 눈이 꽂혔다.

 엄마가 수수한 한복을 깨끗이 차려입고 나랑 남동생, 여동생, 이렇게 일곱 형제 중 어린 막내 셋을 데리고 똑바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었다.

 장소는 가야공원, 우거진 꽃나무 옆이었다. 원피스를 입고 동생들과 같이 엄마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나는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1963년 무렵의 사진이다.

 생각해 보면 봄, 가을, 매년 두 번씩 엄마는 올망졸망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집에서 500m 정도 걸어 올라가는 가야공원으로 나들이를 가시곤 했다.

 날 잡아서 아침부터 우리들 옷을 갈아 입히고 김밥을 말고 달걀을 삶고 콜라병, 사탕 봉지 등 그 전날 사다 놓은 간식들을 챙겨 담아 집을 나섰다.

 공원에 도착하면 일단 한 바퀴 공원과 사람들을 구경하고 사람들이 붐비는 틈바구니에서 자리 펴기 좋은 곳을 찾아 음식들을 펼쳐놓고 놀다가 사진사를 찾아 기념사진을 찍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사진은 며칠 후 집으로 우편배달되어 왔다.


 콸콸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많고 무성하게 키 큰 나무가 좋고 예쁜 꽃들도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많이 피어 있는 가야공원은 구덕산 북쪽 아랫자락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개인 소유라 줄을 서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다. 인근 몇 km 근방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오는, 꽤 알려진 명소였다.

 봄, 가을 주말이면 아침에는 공원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넓은 길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기울어 가는 석양 속의 귀갓길은 너 나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먹고 놀던 여흥을 그대로 간직한 채 끼리끼리 춤추고 장구치고 노래 부르며 왁자지껄 무리를 지어 내려오는 모습들로 큰 물결을 이루었다. 꽹과리와 징소리도 끼어 있었다.

 각양각색의 흥에 취하고 술에 취하여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흐트러진 모습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큰길의 풍경은 어린 우리들뿐 아니라 동네 사람 모두의 큰 구경거리가 되곤 했다.


 위로 다 키운 자식들 네 명은 각자 자기 일상에 바빴을 터이고 엄마는 대가족 건사하고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 돌보는 일로 힘겨우셨을 텐데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해마다 봄, 가을 공원 나들이를 연례행사로 주선하신 것을 보면 엄마는 책임감이 강하고 멋을 아는 분이시다.

 

 그 사진 한 장은 어린 시절의 여러 추억들을 불러왔다. 봄날 여동생이랑 나에게 사 주셨던 면 원피스도 기억났다. 내 것은 검은색에 알록달록 기하학적 무늬, 동생 것은 하얀색에 크고 푸른 꽃무늬. 둘 다 뒤로 돌려 리본으로 묶는 긴 끈이 옆에 달려 있었다.


 언니에게 말해서 그 사진을 내가 가졌다. 큰애가 신혼여행에서 사다준 접이식 빨간 명품 지갑에 잘 간직해서 들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슈퍼에서 그 지갑을 잃어버렸다. 무심히 카트에 지갑을 담아 놓은 채 물건들을 구입하다가 계산을 하려고 보니 지갑이 사라진 것이다. 난감하여 이미 봉투에 옮겨 담은 물건들을 계산대에 맡겨두고 황급히 집으로 돈을 가지러 갔다. 돈을 준비해서 서둘러 슈퍼에 도착했다. 그런데 계산원이 바로 그 지갑을 내밀었다. 누군가 그 지갑을 계산대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는 것이다. 지갑 속에는 내용물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담겨 있었다. 신분증과 카드와 현금, 그리고 소중했던 그 사진. 지갑을 잃었던 순간의 당혹감에 철렁 내려앉았던 마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진 덕에 지갑을 되찾은 것 아닐까? 수십 년 전 어린 시절의 형제들과 엄마가 들어 있는 낡은 흑백 사진을 보고는 그 지갑을 돌려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어쩌면 돌아가신 어머님의 영혼이 도와주셨을지도ᆢ


 2014년 초여름, 사도 바오로의 선교 발자취를 따라 터어키 성지순례 여행을 떠났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차창 오른쪽은 지중해의 짙푸른 물결, 왼쪽은 오래된 성벽의 잔해인 고색창연한 돌담들, 그리고 전면은 눈앞 가득 펼쳐지는 튤립들의 향연.

 투명하도록 맑은 공기 속에서 모든 것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의 열정이 녹아있는 여러 지역들, 독특한 자연경관으로 장관을 이루는 명소들을 둘러보며 유서 깊은 문화와 경치들을 맛보았다. 곳곳에서 흔하게 파는 석류 주스와 케밥도 틈틈이 사 먹어 가면서.


 그중 하루는 에페소로 향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후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 기도하던 성모님과 제자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은혜를 받아 베드로를 선두로 과감히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전파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추방 명령을 받아 온 땅으로 흩어지면서 이곳 에페소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열두 제자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현존을 강렬하게 체험한 오로 사도가 2차, 3차 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교회를 세웠고 바오로의 순교 후에는 요한이 이곳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이곳 에페소에서 요한은 요한복음을 남겼으며 바오로는 로마서를 집필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아끼는 두 편의 성경 말씀이다.


 그러나 아랍인들과 터어키인들의 침략과 지진 등으로 폐허가 되었기에 지명도에 비해 볼 것이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좁은 산길을 달려 에페소 근처 해발 400미터 불불산 산꼭대기 아래, 피나야 카풀루라에 도착했다.

 그곳 산속 깊은 곳에 숨겨진 듯 다소곳이 자리 잡은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방문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당신 어머니를 부탁받으신 사도 요한이 마지막까지 성모님을 모시고 사신 집과 경당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 에페소의 외진 산속 마을로 옮겨와 AD 37년부터 48년까지 10여 년의 은둔 생활로 여생을 마치신 마리아. 참혹한 세월을 살아오신 성모님은 늙었으며 남편 요셉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분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예고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가슴으로 키워온 아들 예수는 십자가상 처형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홀로 사도 요한의 보살핌을 받으며 박해를 피해 멀리 소아시아 터어키의 에페소까지 피난 와서 산속에 숨어 사셨던 성모 어머님의 말년은 문자 그대로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 아픔이 그대로 녹아 있는 듯 살며시 숨어있는 그 집터와 경당,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건너편에 있는 에페소 성 바깥 깊은 산속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는 그곳.

 발을 들여놓는 순간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성모님의 거룩하고도 힘들었던 일생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며 우리들의 현재 힘든 일상을 위로하고 등 두드려 주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흐느껴 울었다.

 엄마의 일생, 여자의 일생, 사랑과 헌신의 일생, 끝까지 그 고통을 다 인내하고 걸어가신 인고의 일생이 슬픔의 큰 파도로 밀려왔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오른쪽 한 귀퉁이에 성모님 상이 모셔져 있고 그 밑에는 세계 각국 많은 순례객들의 소원을 담은 기도문 쪽지들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나는 순간 지갑을 열고 고이 간직해 온 그 사진을 꺼내 그곳 한 귀퉁이에 정성스럽게 봉헌했다.

 세상 떠나신 부모님과 남은 인생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야 할 형제들의 구원과 평화를 빌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 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이 지상의 삶에서 내가 다시 그곳에 가 볼 일은 거의 없겠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곳이 되었다.

 외진 깊은 산속에 고즈넉이 숨어 있던 경당. 진한 인내와 겸손과 사랑의 기운이 가득 차 있던 곳. 따뜻한 위로의 은총이 살아 숨 쉬던 곳.


 사진 봉헌을 마치고 뜨거운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나오니 일행들은 이미 큰길에 있는 버스를 향해 저만치 멀리 걸어가고 있었고 인솔 신부님 혼자 경당뜰 돌 위에 걸터앉아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아무 말씀 없이 두 눈이 빨개져 앞서 가는 내 뒤를 따라오셨다.


 벌써 또 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 순간 그곳에 바쳤던 그 사진은 어떤 운명으로 어떻게 변해 있을까?


 돌아가신 부모님과 지상의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은총 가득한 평화를 누리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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