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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Aug 24. 2021

 신세계

 돌아올 곳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여행. 삶의 활력소가 된다는 여행. 그러나 빡빡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여행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격세지감이 물씬 풍겨 나는 말이 되겠지만 해외여행 자유화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던 1989년 1월, 그때가 내 인생의 30대 시절이었으니 다섯 식구의 안주인으로서 혼자만의  해외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물질의 문제를 떠나 구태의연한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했던 탓도 컸다.

 모든 직장인들이 주 6일 근무하던 시절. 일요일에도 남자들은 직장 동료들끼리 엮여서 산행, 바다낚시, 체육 대회, 테니스 대회, 캔미팅 등등으로 가정보다 직장이 우선이었다. 가족끼리 혹은 부부끼리의 해외여행은 아직은 생소한 시절이었다.


 종합 상사에 근무하던 남편은 1년에 서너 번씩 해외 출장을 다녀오곤 했다. 좋아서 가는 게 아니라 일 때문에 할 수 없이 간다는 푸념도 잊지 않았다.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다. 언어가 다른 곳으로, 그것도 업무상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일이니 긴장과 격무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으레 현지 관광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부러운 일이었다.


  년에 겨우 사흘 정도 주어지는 여름휴가는 매년 예외 없이 그 행선지가 시댁이 있는 경남 함안군 가야읍 춘곡리로 고정되어 있었다.

 농촌 부엌 근대화 사업의 보조를 받아 부엌방에 싱크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 더운 여름에도 마당에 걸어 둔 솥 아궁이에 불을 피우거나 석유곤로에 불을 지펴 식사 준비를 했다.

  아이들은 끌어올린 지하수를 받아 수돗가의 빨간 고무 대야에 들어앉아서 물놀이 피서를 했다.

 춥든 덥든 날씨에 상관없이 끼니 때마다 적지 않게 쏟아져 나오는 설거지감들을 치맛자락 착 감싸 포개 넣고 쪼그리고 앉아 다 처리해야 했던 그 실외 멘트 바닥.


 이렇게 20여 년의 결혼 생활이 흘러가고 있을 즈음인 2002년. 백화점 문화센터 부부댄스 강좌에서 우연히 만난 여고 동창 네 부부들과 함께하면서 나의 신세계가 열리기 시작했다.

 댄스 강습 시간은 물론 평일 낮에도 짬짬이 우리 여자들끼리 뭉쳤다. 후다닥 집안일을 해치우고 백화점 문화센터 무료 특별 공연들과 개봉 영화를 감상하고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앙증맞은 디저트 조각 케잌의 달콤함을 즐겼다. 아이 셋을 키우며 논술 과외, 성당 활동 등으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던 나에게는 카페 출입 자체가 신선한 체험이었다. 에스프레소, 라테, 캐러멜 마끼아또, 아포가토, 입에서 사르르 녹는 치즈 케이크, 타르미슈 등 낯설었던 카페 문화에 익숙해졌다. 까르보나라, 라자냐, 리조또, 치아바타 등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메뉴들과도 친근해졌다. 삶이 한 단계 더 풍요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2005년, 야심만만한 과제가 주어졌다. 여고 동창끼리 4박 5일, 남경, 황산, 항주를 거치는 패키지여행을 가자는 계획이었다. 경비는 599,000원, 여행사는 투투 항공 여행사. 명분은 여고 졸업 30주년 기념 행사.

 결혼 후 나는 가족을 떠나 혼자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큰애는 이미 결혼하여 독립된 가정을 이루고 있었고 둘째는 대학교 4학년, 막내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때였다. 남편의 평소 성향으로 보아서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분위기였지만 나에게는 부부 댄스를 같이하는 막강한 네 명의 여고 동창 응원 부대가 있었다. 그 네 명이 모두 이번 여행에 참여했다. 그 분위기에 남편도 편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들과의 여행, 드디어 첫 테이프를 끊었다.


  2005년 9월 28일 낮 12시 10분. OZ349 항공기 편으로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남경으로 향했다. 18명의 친구가 함께한 여행. 이제 막 50이라는 숫자를 달기 시작하는 나이였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십대 때의 그 시절로 돌아갔다.

 웃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한 체육 선생님에게 단체벌을 서던 시절. 벌을 서면서도 킥킥 숨 죽여 웃고 그로 인해 벌은 더 가중되고ᆢ. 전염성이 강한 웃음기 속에서 웃지 않는다는 게 왜 그리 힘들었던지. 그게 또 왜 체벌의 이유가 되었던지.


 30년의 세월을 껑충 뛰어넘어 또다시 조그만 것 하나에도 호기심 가득 실은 탄성이 터지고 들뜬 웃음꽃이 와르르 쏟아졌다. 여행은 '언제, 어디로'가 아니라 '누구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소리 내어 발음하면 묘한 단어가 되는 18명의 여자가 함께하는 4박 5일의 일정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남경의 자랑인 쑨원의 묘실과 일본의 침략 역사 흔적을 생생히 그대로 보존한 난징 대학살 기념관.

 일본 제국주의의 대학살과 그에 대한 남경의 배일 감정을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남경에서는 일본인에게 택시도 태워 주지 않는다고 현지 가이드가 강한 어조로 설명했다.

 중국에서의 첫날밤을 보낼 황산으로 향했다.


 태평 케이블카를 타고 황산의 제2의 고봉이라는 광명정에 올랐다. 케이블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등산로에는 배낭을 멘 등산객들이 뜸뜸이 보였다. 나도 저렇게 걸어 보았으면 싶었다. 눈 아래에 펼쳐진 대나무 숲의 푸른 물결. 미끈한 잎사귀들의 일렁임과 키 큰 대나무 가지들의 휘청거림. 바람이라는 자연이 연출하는 초록의 출렁임을 내려다보며 떠올린 것은 이안 감독의 무술 영화 <와호장룡>. 주윤발과 장쯔이가 대나무 숲에서 펼치던 액션씬. 출렁이는 대나무 가지들을 사뿐사뿐 딛으며 마치 춤을 추듯 가볍게 공격과 방어의 무술을 펼치던 장면이다. 목숨을 건 결투 장면이었지만 주윤발의 여유로움과 장쯔이의 아름다움이 뿜어내는 매력으로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아 버렸던 황홀한 경공술. 사실 그 영화의 실제 촬영지는 황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홍춘이라는 민속마을이라고 하지만.


 광명정과 배운정과 비래석 관광 등으로 하루 일정을 채우고 황산 꼭대기에 있는 호텔로 향했다. 묵게 된 호텔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바위 옆에 바싹 붙어서 지어진 탓인지 방안은 습기로 눅눅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의 찬 공기를 막아줄 방한복이 서랍장 속에 있다기에 열어보니 온통 눅눅한 습기에다 하얗게 곰팡이까지 슬어 있어서 손을 대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후각이 예민한 한 방 친구는 콜록거리며 많이 힘들어했다.


 가방을 던져둔 채 밖으로 나왔다. 마침 이틀 후로 다가온 10월 1일이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국경절이었다. 행사를 위해 고위 간부가 이 호텔에 묵을 모양이다. 야외 계단마다 붉은 카펫이 깔리고 넓은 정원 곳곳에 무장한 군인들이 쌍쌍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은 썰렁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안전하기도 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우리들은 조그만 정자 하나를 차지했다. 이런저런 수다들을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조그만 목소리로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한 명이 첫 소절을 시작하면 다 같이 조용히 합창을 하고 그 곡이 끝나기 바쁘게 또 누군가가 새로운 노래를 선창하여 모두가 합류하는 식으로 끝없이 노래가 이어졌다. 가곡, 동요, 유행가, 팝송 할 것 없이 아는 노래가 총동원되었다. 그렇게 1시간 남짓 시간이 흘러갔다. 주변은 거의 어둠 속으로 묻혀 갔다. 약간은 싸늘해진 기온, 웅장한 자연으로 둘러싸인 이국땅 황산 호텔에서의 가을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우리들의 우정과 추억도 그 속에서 익어 갔다. 비슷한 정서와 추억을 가진 친구들만이 만들 수 있는 공감과 합일의 자리는 행복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부동의 자세로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들도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름 우리들의 수준 높은 여가선용이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지 않았나 하는 철없는 자부심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은밀하게 웃었다.


 이튿날은 새벽 일찍 청량대 일출을 보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어디서 가장 멋진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인지, 좋은 자리를 탐색하며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다.


 희부염하니 날이 밝아올수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해 뜰 무렵이 되자 산 봉우리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꽤 오랜 기다림 끝에 일출을 만났다. 맑은 날씨 덕에 황산에서의 일출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라 커다란 행운이라는 가이드의 호들갑을 들으며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이틀째 이어지는 황산 여행. 중국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답다는 황산. 수많은 돌계단을 오르내리며 기기묘묘한 화강암 산봉우리와 깊은 계곡들이 펼치는 절경을 감상했다. 하나하나 모두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었던 인상 깊은 두 가지 장면이 있다. 극과 극을 이루는 인간의 신분 차이, 빈부 격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습이다.

 인부 둘이 앞뒤에서 메고 가는 가마를 타고 가파른 돌계단 길을 편안히 흔들리며 올라가는 풍채 좋은 노부인.

 한쪽은 긴 막대 끝에 커다란 광주리 두 개를 매달고 그 속에 각종 식자재를 가득 채워 담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무겁게 출렁거리는 바구니의 균형을 유지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 힘겹게 한 칸 한 칸 오르는 사람들이다. 한둘이 아니었다. 짬짬이 관광객들이 터주는 좁은 계단 옆으로 쉬지 않고 오르내리며 황산 정상에 있는 호텔 주방으로 온갖 식자재들을 운반하는 인부들이었다. 한결같이 깡마르고 필요한 근육들만 불끈불끈 솟아올라 있었다. 남루한 의복은 땀에 흠뻑 젖어 있고.

 어떤 때는 앞뒤 광주리 하나 가득 달걀이 담겨 있기도 했다. 그걸 하나도 깨뜨리지 않고 끝없어 보이는 그 험한 돌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오르는 모습은 또 한 명의 장인의 모습이었다. 양배추, 애호박, 감자 등 노끈으로 엮은 긴 광주리 안의 모든 내용물들이 훤히 다 보였다. 아마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호텔 투숙객인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황산 정상 고급 식당에서의 식사를 즐길 뿐이다.


 일상적인 삶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극한직업에서 제공되는 노동력과 일탈의 한가함을 즐기는 관광객들의 호사가 아무런 거부감과 불협화음도 없이 아주 당연한 듯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운곡 케이블카로 하산한 후 포씨 가문의 영예를 보여준다는 당월패방군에 들렀다. 부와 명예를 자랑하는 전통적인 중국 부호 가문이 뿜어내는 장엄한 향기가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인 거대한 지하 동굴 화산 미굴. 중국이라면 떠올리는 인해전술. 아마 이 동굴도 그런 문화의 산물일 것이다. 땅 속에 이런 거대한 공간이 있다니. 밖에서 보면 아주 평범한 들판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이 특이한 유적을 한꺼번에 개발하지 않고 천천히 천천히 미래를 위해 발굴을 아껴두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다시 버스에 올라 항주로 향했다. 발마사지로 여행 사흘째를 마감했다.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인 서씨처럼 아름답다고 해서 시쯔후라고도 불린다는 서호로 향했다. 표면적이 17만 평에 달한다는 이 호수조차 인공이라는 점이 중국의 거대한 힘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명승지답게 사람들로 북적인다.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 9월 말이지만 황산이 춥다는 정보에 다들 따뜻한 쪽에다 초점을 맞춘 옷들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는 항주는 따뜻하다 못해 더웠다. 거의 한여름 날씨. 우리 같은 관광객들이 많은 모양이다. 여기저기 여름옷들을 팔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일론이 많이 섞인 인견 소재로 보이는 올록볼록 질감의 라운드 티 같은 블라우스. 가볍고 시원한 데다 가격까지 가벼웠다. 5천 원. 우리 열여덟 명은 각자 취향에 맞는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골랐다.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갈아입었다. 이미 입고 있던 긴 바지는 걷어 올려 반바지로 만들어 놓았다. 뛰어난 적응력과 순발력. 색깔과 무늬는 다르지만 단체복이 된 그 옷을 입고 이름까지 붙였다. 솔방울 자매.


 배를 타고 호수를 가르며 경극에서나 나옴직한 뱃사공의 고음 발성 노래도 들었다. 비래봉 관광이 포함된 영은사 사찰을 거쳐 13층 높이의 육화탑을 들러서 여행 마지막 코스인 송성 민속쇼 관람에 들어갔다.


 세계 최대의 인적 자원과 광대한 국토를 소유한 대국답게 질과 양이 관람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엄청난 공연이었다. 여름밤 공기를 마시며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은 11시 35분 OZ360편으로 귀국하는 일정만이 남아 있었다. 2시간 정도의 비행 끝에 오후 2시 반,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 친구의 남편이 처녀티가 나는 장성한 딸과 함께 들국화 꽃다발을 챙겨 들고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콤비 윗도리를 갖춰 입은 차림도 말쑥했다. 그 남편은 공항에는 나올 생각조차 못하는 우리 남편과 대학 동기동창이다. 다음 부부 동창 모임에서 그분은 친구들로부터 핀잔 아닌 핀잔을 꽤나 들었다. 마누라한테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길래 그런 해프닝을 했냐고.


 마중 나온 다른 친구 남편의 차에 편승하여 집으로 향했다. 비슷한 방향이었기도 하지만 친절한 배려로 우리 집 입구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텅 빈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자 남편의 단정한 필체가 담긴 16절지 하얀 프린트 용지가 거실 마루 끝에 놓여 있었다.


 Welcome home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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