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네 집에 냉장고를 바꾼다고 한다. 2003년 혼수로 마련해 간 것을 처음으로 바꾸는 것이니 18년을 쓴 셈이다.
나도 작년 이맘때에 18년 만에 냉장고를 바꾸었다. 우리 두 집은 전에 썼던 기종도 똑같고 이번에 바꾼 기종도 똑같다.
시골을 떠나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사실 냉장고 교환을 많이 망설였다. 아직 고장도 나지 않았고 쓸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맘 먹고 바꾸기로 했을 때 아이들이 강추하는 모델명이 있었다.
'너무 크고 비싸지 않나?'
쉬이 결정짓지 못하는 나에게 아이들이 한마디 강타를 날렸다.
"엄마, 엄마의 자유의지로 냉장고를 교환하는 일이 엄마 생애에서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어요."
깜짝 놀라 생각해보니 사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또 18년 후면 80도 중반을 넘어서니 말이다.
아이들이 한 단계 더 몰아붙인다.
"엄마, 꼭 4 도어 모델을 써 보세요. 그렇게 편리하고 좋다는데 엄마도 꼭 한번 써 보셔야죠."
그렇게 해서 냉장고 교환과 함께 모델명까지 정해졌다. 나에게는 익숙지 못한 변화다. 아이들 셋이 이사 환영 기념 선물로 구입해 주었다.
쓰던 냉장고는 이삿날, 트럭을 가지고 온 사촌이 얼씨구나 싣고 갔다. 시골에서는 냉장고가 다다익선이다. 생산되는 먹거리들이 많은 데다 도시와 달리 공간이 넉넉하니 지붕과 벽만 있으면 어디에나 냉장고를 쉽게 놓아두고 편하게 쓴다. 전기요금도 농어촌 보조용으로 뭔가 싸게 공급되는 제도가 있는 것 같았다. 노쇠한 할머니 혼자 지내시는 집이 아니면 대부분 큼직한 냉장, 냉동고가 부엌뿐 아니라 창고에도 여러 대씩 턱 하니 자리 잡고 있다.
우리 것도 아직 고장은 나지 않았지만 18년이나 고맙게 잘 쓴 오래된 냉장고를 누군가 기쁘게 가져가 잘 쓰게 되었으니 그 또한 잘된 일이다.
냉장고를 바꾼다니 뭔가 잔손 가는 일이 많을 것 같아 큰애네 집엘 가 보기로 했다. 남편과 함께 점심을 먹은 후 뒷설거지를 끝내고 오후 간식을 찾기 쉽게 알려 주었다. 늦어질 경우 저녁 식사까지 찾기 쉽게 냉장고 앞칸에 정리해서 알려 주고 집을 나섰다. 남편 혼자서 식사를 찾아 먹는 일은 두 달여 만에 처음이다. 하지만 괜찮을 것이다.
큰애네 집에 도착하니 오후 세 시. 미리 귀띔해 준 대로 사위는 재택근무 중이고 중학생 두 손녀는 등교와 줌 수업으로 각자 일과에 바빴다.
새 냉장고는 가동 후 두 시간이 지나서 음식을 넣어야 냉장고에 냄새가 베어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 주의 사항대로라면 4시 30분부터 냉장고 정리를 할 수 있다.
더운 날씨에 냉동 냉장실에서 다 꺼내 놓은 음식물들의 포장지와 그릇 표면에는 송글송글 물방울들이 맺히고 있었다.
꺼내어 쌓아 놓은 음식물들의 부피가 상당했지만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엄마가 온다니까 딸이 미리 애를 많이 쓴 모양이다. 이번에 구입했다는 2만 원짜리 전동 빙수기로 맛난 팥빙수를 만들어 주었다. 우유 얼음 가루 위에 유기농 팥빙수용 팥과 미숫가루와 제주도 오메기떡까지 넉넉하게 올린 고급진 밀크 팥빙수였다. 거기에다 따끈한 피자 한 조각까지 후한 간식을 맛나게 먹었다.
3시 50분, 딸에게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 들어오고 딸은 학생과 같이 공부방으로 향했다.
4시 반이 되었다. 냉장고에 붙은 보호막 비닐을 벗기기 시작하자 사위가 나왔다. 같이 식품들을 정리해 넣기 시작했다.
사위 둘을 비롯하여 아들까지, 요즘 젊은 남편들은 부엌일에 훤하다. 마른행주가 어디 있는지, 노란 고무줄이 어디 있는지 말만 하면 척척 찾아서 대령해 온다.
냉장고 문을 열면 바로 코앞에 있는 유리 김치 그릇도 당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우리 세대 남정네들과는 달라도 아주 다르다.
친구들은 아들이랑 사위들을 '신인류'라고 부른다. '구인류'를 짝꿍으로 두고 있는 우리들을 스스로 위로하면서.
비닐 포장지 속에 담긴 가지각색 냉동식품들이 금세 넓은 냉동실 박스 네 칸을 꽉 채웠다. 옆에서 나보다 더 재빠른 몸놀림으로 정리를 함께 하는 사위는 어디 한마디 군소리가 없다. 오히려 내가 한마디 할까 봐 방에서 수업 중인 아내를 대신해서 먼저 역성을 든다.
''코로나로 식구들이 모두 집밥을 많이 먹으니까 00가 애를 많이 써요."
나도 코드를 맞추어 맞장구를 쳤다.
"너희들이 이리 풍족하게 사니 보기 좋다. 김서방 자네가 여물고 성실해서 그런 것 아이가."
손발 척척 맞추어 짧은 시간 안에 정리가 후딱 끝나고 이제 곧 퇴근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사위는 다시 컴퓨터 방으로 들어갔다.
딸도 중간에 한 번 나와 보고는 정말 좋다며 활짝 웃고는 다시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뒷설거지랑 마무리를 하며 얼룩이 보이는 싱크대 문짝까지 눈에 띄는 대로 닦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학원에 태워다 준 중3짜리 딸을 이번에는 데리러 나서는 사위의 승용차에 올라 가까운 전철역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기 30분 전 남편에게 전화를 넣었다. 저녁 식사를 꺼내어서 혼자 먹고 있다고 한다. 우려했던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튿날 아침, 피자가 맛있다는 말에 바로 그 자리에서 딸이 택배 주문해 준 치즈 폭탄 시카고 피자와 훈제 닭가슴살과 난각 번호 1 동물복지 자유 방사 유정란, 제주 청정 생치즈, 메추리알 간장 조림 등이 담긴 커다란 박스가 현관 앞에 놓여 있었다.
가족 카톡방에는 냉장고 설치 잘 되었나 궁금해하는 아들의 글이 떴다. 누나는 정리된 냉장고 사진과 함께 '음식물이 모두 여유 있게 들어가고 한눈에 다 보여서 정말 좋다.'는 답글을 올렸다.
그리고 덧붙여진 글 한토막.
"아,참, 오늘이 김서방 생일이라서 단체방에 간단히 축하 한번 부탁드립니다."
어른 여덟 명이 들어 있는 단체방에 축하 인사와 감사 대답이 줄을 이었다.
미리 챙겼으면 어제 봉투라도 하나 전해주고 오는 건데 올해는 어찌 맏사위 생일도 깜빡한, 센스 없는 장모가 되어 버렸다.
안달복달 신경 곤두세울 일은 아니지만 헛되이 놓치지 않으리라.
귀한 인연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행복한 시간들을.
2021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