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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Sep 08. 2021

구겐하임 미술관

   예술의 품


 7일째 들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1980년 빌바오의 철강 산업 쇠퇴로 도시가 피폐해지자 1991년 바스크 지방 정부가 몰락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문화산업 육성을 택한 결과물이다.

 네르비온 강변의 1만 평 땅에 항공기 몸체로 쓰이는 티타늄 패널 3만여 장을 사용하여 7년 동안 당초 예산의 14배에 해당되는 건축 비용인 1억 달러를 들여 완공했다.

 건축 설계자는 프랭크 게리.

 그 결과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한 해 100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관광 도시로 급부상하여 빌바오 효과라는 대명사까지 탄생시켰다.

 전시 예술품보다 미술관이 더 유명한 미술관,

 에스파니아의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제일 먼저 만난 작품은 초현대적인 미술관 앞뜰에 껑충하게 놓여있는 거대 거미 조형물이다.

 대리석 알들을 품고 있는 9.1m 높이의 청동 거미.

 제목은 ma man, 나의 어머니.

 작가 루이스 부르조아지가 아버지의 외도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가정을 지키는 작가의 어머니를 표현했다.

 경외감과 두려움을 주는 거대한 크기는  엄마의 강한 모성애를 상징하지만 버티고 있는 가느다란 다리는 제도와 인간으로부터 다치기 쉬운 여성성을 의미한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을 작품으로 용서하고 연약한 엄마를 향한 연민을 담았다는 ma man.

 거미의 모성.

 당연히 보호받고 존중받고 도움받아야 할 위대한 모성이 학대받으며 상처로 얼룩진 채 힘들게 외로이 감당해 온 험난역할. 그로 인해 겪었을 그 어머니와 자식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보호받지 못하는 모성.

 보호하지 못하는 부성.

 사실은 그 둘 다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빚어진 슬픈 희생제물이다. 인간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 상처의 대물림일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많이 울었다.



 현대의 추상표현주의 예술품들로 채워진 미술관 내부.

 강한 메시지를 던지며 한참씩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품들을 지나 304호실에 전시되어 있는 한 작품 앞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 그냥 멈추어 서 버렸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세로 높이와 그것의 1.5배쯤 되는 가로 폭. 전체 표면이 가로로 크게 3등분되어 맨 아래는 밝은 빨강, 중간은 노랑, 맨 위는 약간 어두워지는 노랑을 거쳐 다시 밝고 연한 노랑으로 이어졌다.

 세계 제일의 색면화가로 불린다는 마크로스코의 작품이다. 거대한 캔버스를 기하학적으로 분할한 후 반짝이는 단일 색으로 화면을 가득 칠하여 커다랗고 모호한 색면과 불분명한 경계선을 표현한다.

 색채와 텍스처(질감)의 대담한 덩어리로 그는 그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심장과 그 생명의 작용으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 그 뜨거운 피가 이승의 삶을 다 살아낸 뒤 점점 정화되고 승화되어 가벼운 영혼으로 천상에 녹아드는 모습.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듯 색깔은 다시 어두워지기도 하고 경계선에 의해 나뉘고 끊기기도 한다.

 가까이 다가가 세심히 살펴보면 생채기 같은 빗금들이 여기저기 수없이 그어져 있다. 뚜렷이 드러나 보이기도 하고 희미하게 숨어 있기도 한 수많은 상처들의 흔적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그림 전체는 저리 환하고 따뜻한데, 그리고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그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눈물에 속수무책일까?

 내가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헛된 교만의 욕망들이 수없이 그어진 가느다란 빗금들처럼 나를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기 때문일까?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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