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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25. 2021

두 번째 독립  2/2

   다  떠나간 빈 둥지


 드디어 이삿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 일찍 도착한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친절하고 신속하고 유능한 전문가들의 솜씨로 척척 어려운 일들을 잘도 해냈다. 아직 잠이 덜 깬 손주들은 유치원 복장을 갖추고 아빠 차를 타고 이사 갈 집 근처에 사시는 친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오늘은 친가에서 아침을 먹여 유치원엘  보내시고 유치원을 마친 뒤에도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보살펴 기로 하셨다.


 오전 중으로 짐이 다 빠져나가고 딸과 사위도 그 뒤를 따랐다. 짐 빠져나간 뒷설거지를 대강 하고 남편과 함께 딸이 이사한 집으로 향했다. 넓고 환하고 새로 손질한 깨끗한 집에 딸과 사위가 고심해서 구입한 새 가구들이 들어오고 짐이 부려지기 시작했다.


 대충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남편이 운전하는 옆 자리에 앉아 오는데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너무 서러운 눈물이었다. 이삿짐 준비를 하면서도 수시로 뜨겁게 울컥울컥 했지만 바쁜 일에 파묻혀 그냥 지나가곤 했는데 이젠 그냥 울음보가 터진 것이다. 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직장생활이랑 육아, 그리고 살림살이하느라 얼마나 힘들까? 짠한 마음이 집에 도착해서도 진정이 되질 않는다.


 아들방 침대에 걸터앉아 울고 있으니 남편이 다가와 말했다.  


 "왜, 나 때문에 그래?"


  어설프고 인색하게 내가 대답했다.


 "섭섭해서 그렇지."


 남편은 더 이상 말없이 거실로 나갔다.


 왜 이리 서운한지,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한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정말 착하고 성실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던 우리 딸. 나도 저도 일에 파묻혀 곰살맞게 다정한 시간은 별로 갖지 못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사와 학업과 두 아이 돌보는 일에 온 시간을 다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딸에게 별로 잘해 주지 못했던 아쉬움에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그리고 떠나간 빈자리가 왜 이리 넓고 휑한지. 새벽 두세 시까지 문 틈으로 불빛 새어 나오던 서재가 이제는 텅 빈 공간으로 아무 의미 없이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딸이 수시로 챙겨서 구입해 준 온갖 영양제들이 식탁 위에도 찬장 속에도 넉넉히 쌓여 있다. 유산균, 각종 비타민, 마그네슘, 오메가 3, CoQ10, 스피룰리나 등등. 아마 앞으로 다시는 이리 같은 공간 안에서 함께 숨 쉬고 함께 밥 먹는 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저는 서른 여덟, 나는 예순 넷.


 힘들었지만 알차고 풍성하고 보람찼던 시간들이었다. 자식들 다 키워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부모의 처지를 속이 텅 비어 둥둥 떠 내려가는 고동 껍데기로 표현하시친정어머니 생각이 났다.


 3년 차 중등 국어교사 교직생활을 접고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 온 지하 단칸방, 서울 우리 집엘 다녀가시면서 대구까지 기차 속에서 계속 우셨다던 어머니. 지금 나는 남편도 있고 돈도 있고 자식들도 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데도 이리 서러운데 남편도 없고 돈도 없고 천 리 길에 아끼던 자식을 뚝 떨어뜨려 놓고 홀로 부산으로 내려가시던 어머니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그 당시 나는 바로 옆에 큰언니가 살고 있었고 스무다섯 살 새댁이 이제 막 돌 지난 첫째를 데리고 어설픈 신혼살림하기에 바빠 어머니의 심정을 전혀 헤아려 드리지 못했다. 새 살림 챙기기에 바쁜 우리 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온갖 정성을 다 쏟아 사랑과 헌신으로 돌보고 있는 아이들을 키워 독립시키면서 또 똑같은 슬픔을 만날 것이다. 이 모든 생각들이 밀려오면서 자꾸만 더 가슴이 아려 왔다.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 점심 준비를 서둘러 보았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속 코를 푸느라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느라 손수건 한 장이 다 젖어 버렸다. 남편은 텅 빈 세 개의 넓은 방과 거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제 반으로 줄어든 식탁에 대강 점심을 차려 놓고 남편을 불렀지만 남편도 쉬이 자리에 앉질 못했다. 혼자 눈을 떨구고 앉아 있던 식탁에서 고개를 드니 맞은편 그릇 찬장 유리에 남편의 뒷모습이 비춰 보인다. 청소기돌리다 말고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다. 짬짬이 목청을 가다듬거나 코를 푸는 소리도 들린다.


 한참 만에 식탁으로 온 남편이 코 막힌 소리로 말했다.


 "꽁지 빠진 닭 같아. ㅇㅇ 방까지 텅 비어 있으니."


 막내인 아들은 다가오는 31일에 결혼식을 올린다. 복닥대는 집을 떠나 미리 조용한 신혼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그나마 바로 옆, 가까운 곳이라 다행이다.


 "아이들이 화려하고 예쁘게 우리들의 깃털이 되어 줬는데 그걸 몰랐네."


 나는 그 말에 아무 위로도 하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닦기 바빴다. 눈물을 삼켜 가며 점심을 먹는데 이웃 교우 자매 두 명에게서 번갈아 전화가 왔다. 몇 년 전부터 의기투합하여 함께 산행도 하고 밥도 먹는 이웃사촌 삼총사 부부들이다. 이사 간 둘째네 집에 함께 가 보려고 뭘 좀 샀으니 나오라고 한다. 울면서 전화를 받으니 무조건 빨리 밖으로 나오라고 재촉한다.


 시간 약속을 하고 이것저것 정리를 하는데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눈물 머금은 내 목소리를 듣고 위로하며 자기도 어젯밤에 혼자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 아빠 덕분에 여기까지 왔으며 엄마 아빠가 아니었으면 자기는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됐을지도 모르고 엄마 아빠가 자기의 구세주라고, 정말 감사하다고, 정말 수고하셨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아무 때나 오시고 낮에 비어 있는 자기 집을 엄마 아지트로 쓰시고 자기들도 자주 들르겠다고.


 약속 시간이 되어 밖에서 이웃들을 만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 부부, 여섯 명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자식들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직은 혼자 있는 아들 집에 잠깐 들러 얼굴을 보고 집으로 왔다. 누군가 불러내 주지 않았더라면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을 것 같다.


 휑하니 텅 빈 집에 둘이 앉아 그동안 볼 수 없었던 TV 앞에 앉았다. 손주들에게 점령당했던 TV 채널을 돌려 정말로 오랜만에 '인간극장'을 보았다. TV 시청도 끝나고 각방에서 잠을 청하려 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지금까지는 아이들 뒷바라지와 집안일에 휘둘려 밤잠, 새벽잠을 설쳐 가며 정신없이 지내느라 각방 생활이 필요했다. 

 화장실 벽과 맞붙어 있는 자그마한 부엌방이 내 방이었다. 벽을 통해 들려오는 샤워 수돗물 소리로 아이들의 늦은 귀가와 빠른 출근을 짐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뭔가 조금이라도 준비해서 먹여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빈 집에 둘만 남은 지금은 새로운 전기가 되어야 했다. 부부 관계 회복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며 적당한 타이밍에 서로를 위한 적절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괜한 헛말은 아니다.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갔다. 언제부터 각방을 쓰며 자유로워했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다행히 남편도 별 거부 없이 자리를 내주었다. 퀸 사이즈 커다란 흙침대 위에는 내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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