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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무아 Oct 15. 2021

한 지붕 두 가족 1/2

    세 세대, 일곱 명의 한집 살이

 

 2015년 봄. 

서른다섯 살. 결혼생활 6년 차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둘째는 약대 3학년이 되었다.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하여 영업기획부에서 일하던 중 결혼을 했다. 매일 늦은 귀가로 이어지는 직장 생활은 결혼 생활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사위의 적극적인 응원을 받으며 5년 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약대 진학에 도전하였다.

 문과 공부에서 취득하지 못한 이과 과목의 대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약대 입학 자격시험 PETT를 치르고 또 입학시험에 합격하기까지 힘들고 긴 과정을 성실히 잘해 내었다.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 첫째가 태어났다.

 20개월 차이가 나는 둘째는 약대 1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 태어났다. 시험을 끝내고 혼자 정기검진을 받으러 산부인과 병원에 들렀다가 아기 문이 많이 열렸으니까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라 바로 출산 준비로 들어간 것이다.

 그날 밤, 2013년 12월 21일 둘째를 순산했다.

 병실 머리맡에는 어제까지 학교에 메고 다녔던 무거운 배낭 책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가가 하루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1년 유급을 했어야 할 형편이었으니 아가는 효자 중에서도 효자다.


 사위는  많기로 소문난 로펌 근무 6년 차에 접어들었다.

17개월, 37개월, 한참 손이 많이 가는 두 손주는 입주 아주머니 손에 맡겨져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씩, 특히 아주머니가 귀가하시는 주말에는 거의 항상 용산에 있는 딸네 집으로 향했다.


 이제 겨우 따박따박 걸음을 옮기 첫째, 세 살짜리 외손녀의 손을 잡고 놀이터랑 동네 골목골목, 고불고불 시장 거리를 많이도 돌아다녔다. 제법 먼 효창공원까지의 원정 나들이에도 수시로 도전했다. 돌아오는 길은 잠이 든 예쁜 공주님을 등에 업고 오거나 택시 신세를 지곤 했다.

 친할머니이신 안사돈께서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들르셔서 아이들을 많이 보살펴 주셨다.


 육아와 학업에 시달리는 딸과 격무로 거의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없는 사위, 그리고 남의 손에서 자라는 두 아가 손주들. 집안 분위기는 한 마디로 스트레스 그 자체지 결코 편안한 휴식처, 스위트 홈은 아니었다.

 몇 달 뒤인 8월에는 1년 간 사위의 미국 연수가 결정되어 있었다. 딸은 사위만 보내고 자기는 혼자 아이들을 돌보며 한국에서 학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했다. 졸업이 1년 늦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지금 살고 있는 용산 집을 비워야 해서 우리 집 근처로 집을 옮길 요량으로 알아보았지만 적당한 가격에 알맞은 크기의 집이 없었다. 둘이 의논하여 마포에 월세를 낀 아파트를 임대 계약했다고 한다.

 우리는 레지던트 1년 차에 들어간 아들 때문에 학교가 바로 코 앞에 있는 이 집을 떠날 수 없었다.


 그날도 딸 집엘 들렀다. 아가 둘을 돌보느라 힘든 입주 도우미 아주머니는 입이 뿌루퉁해 있고 공갈 젖꼭지 입에 달고 있는 아가들은 아가들대로 정서가 불안하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생활이 무척 각박해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혼자서 부동산엘 들렀다.


 "사장님, 이 근처에 두 세대가 같이 살 만한 큰 집 나온 게 있을까요?"


 근처에 큰 빌라들이 많은지라 전세 매물은 몇 개 있었지만 너무 크거나 너무 비쌌다. 관리비도 엄청났다. 마땅치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사장님이 말을 꺼냈다. 어제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안에 전세 매물 하나 나온 게 있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그쪽 부동산으로 연결해서 바로 그 집을 방문했다.

 30년 된 오랜 아파트이긴 하지만 방 여섯 개, 70평짜리가 가격도 괜찮게 나와 있었다. 게다가 우리 입주 날짜에 상관없이 이사 나갈 날짜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내 맘에 쏙 들었다.  


 '바로 이거야.'


 둘째에게 전화를 다. 사위에게 물어보겠다고 하더니 좋다고 했다 한다.

 사돈댁에도 의논을 드렸더니 고마운 일이라고 하셨다.


 일사천리, 급속도로 일이 진행되었다.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교우 이웃과 안부를 나누다가 그이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기로 다. 딸이 얻어 놓은 마포 아파트도 다시 내놓았고 바로 다른 주인을 만났다.

 큰돈이 오고 가는 일이 순조롭게 막힘없이 진행되어 2015년 5월 20일, 우리가 먼저 이 집으로 입주하고 이틀 뒤인 5월 22일, 딸네가 이사를 왔다. 전세 비용은 두 집이 반반씩 부담하였다. 따로 살 때보다 주거비 부담이 크게 줄었다.


 이사 당일, 어린 손주 둘은 근처에 사시는 친할아버지 댁에서 아주머니와 함께 하룻밤 자고 온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다. 일손을 크게 덜었다.

 세탁기, 가스레인지, 오븐, 티브이 탁자 등 겹쳐지는 살림살이는 무조건 베란다에 쌓아 두었다.

 

 이럭저럭 그 많던 두 집 살림이 제 자리를 잡아가는 늦은 저녁 시간, 한참 잘못 만진 수돗물 꼭지를 바로 잡고 정신이 없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4년 간 투석 전문 요양 병원에 입원 중이신 어머님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이었다.


 어수선한 이삿짐들을 정리하며 구석구석 손을 보고 있던 남편은 일손을 놓고 부랴부랴 시동생 부부와 함께 바로 병원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어머님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고 89세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도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살림살이들을 그대로 두고 부산으로 향했다. 다행히 입주 아주머니가 셨기에 나의 자리가 그리 크진 않았다.

 

 할머니 장례식에 맞추어 아이들이 다녀가고 남편과 나는 삼우제까지 다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 정말 두 집이 합쳐진 일곱 식구의 대가족 살림살이가 시작되었다.

 양가 네 부모님들 중 마지막인 어머님의 별세로  세대가 다 의자를 비우고 자식과 손주들이라는 아랫 세대와 한 솥밥을 먹는, 새로운 3대 대가족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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