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연필
모두가 빨간색과 파란색만 쓰고 있는 나라
'색연필'은 우리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손에 쥐는 아주 익숙한 도구다. 크레파스와 함께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고 색칠 공부를 하며, 우리는 세상의 수만 가지 색을 색연필을 통해 처음 만난다.
색연필에는 흥미로운 특징이 하나 있다. 쓸수록 끝이 닳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아랫부분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좋은 색연필이라도 제때 돌려주지 않는다면, 그저 딱딱한 몸통에 가로막힌 '짧은 막대기'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의 재능도 이와 같다. 멀리뛰기 세계 신기록을 세울 재능을 가졌어도 도약해 보지 않는다면, 메이저리그를 평정할 투수의 어깨를 가졌어도 공을 던져보지 않는다면 그 재능은 영원히 발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릴 적 받는 기초 교육은 중요하다. 아이들에게 12색 색연필 세트를 쥐어주고, 그중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색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가게 돕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미술 수업에서 미래의 화가를 발견하고, 음악 시간에서 잠재된 작곡가를 깨우는 것,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육 현장의 색연필은 기이한 모습으로 멈춰 서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화려한 색연필 세트를 들고 있지만, 정작 그들이 돌리고 있는 것은 오직 '빨간색'과 '파란색'뿐이다. 입시와 취업이라는 정답을 채점하기 위한 색깔 외에, 나머지 열 종류의 색깔은 아랫부분을 돌려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몸통 안에서 굳어간다.
현실은 냉혹하다. 국어, 영어, 수학이라는 선행학습의 굴레 속에서 예체능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으니 교사들조차 의욕을 잃어간다. 우리는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는 법이 아니라, 규격에 맞는 색을 복제하는 기술만을 연마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진짜 비극은 '다양한 색을 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아랫부분을 돌려 내 안의 것을 밖으로 꺼내는 법, 즉 '회전의 주도권' 자체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시스템이 정해준 색만 쓰다 보니, 정작 나만의 색을 써야 할 순간에 그 톱니바퀴를 어떻게 돌려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린 무딘 막대기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좋은 대학과 안정적인 직장을 위한 '평범한 삶'의 경쟁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색을 포기하고 산다. 어른이 된 후 "나도 어릴 때 그런 걸 해봤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읊조리는 후회는, 우리가 그만큼 많은 색연필을 돌려보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여러 색을 구경시켜 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색연필을 돌려 심을 꺼내고, 마음껏 도화지를 채워볼 수 있는 '기회'와 '힘'을 길러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라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색연필을 돌릴 주도권을 돌려주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