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펜은 무언가를 강조하기에 참 좋은 도구다. 밑줄 위에 형광펜을 한 번 긋는 순간, 그 문장은 다른 문장들과 구별된다. 하지만 모든 필기구 중에서 가장 쉽게 못 쓰게 되는 도구이기도 하다. 뚜껑을 오래 열어두면 잉크가 말라버린다. 다시 써보려 해도 이미 늦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형광펜을 버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재능이 이런 형광펜과 닮았다고 느낀다. 어릴 때는 반짝인다. 주변에서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말에 기대어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관리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계속 써보지 않으면, 그 재능은 생각보다 빨리 말라버린다. 주변을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본다. 재능을 믿고 노력하지 않았던 사람들. 뚜껑을 연 채로 방치된 형광펜처럼, 처음의 선명함만 남기고 결국 평범해진 사람들. 그 모습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요즘은 AI라는 존재가 그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든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거 해줘”라고 말하면, 곧바로 그럴듯한 결과가 나온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AI에게 대신 써달라고 하고 싶은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다. 조금 더 매끄럽게, 조금 더 똑똑하게 써줄 텐데 굳이 내가 이 문장을 붙잡고 씨름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순간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편해지긴 하는데, 어딘가가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느낌. 형광펜 뚜껑을 열어둔 채로 책상 위에 올려두는 기분과 닮아 있었다.
AI를 잘 쓰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고 한다.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나는 그보다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도구를 쓰고 있는 걸까’, 아니면 ‘도구에 기대고 있는 걸까’ 하고. 형광펜은 계속 쓰면 오래간다. 뚜껑을 닫아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종이 위를 움직일 때 잉크는 유지된다. 재능도, 생각도 비슷하지 않을까.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AI를 쓰게 될 것이다. 그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생각을 대신 맡겨버릴지, 아니면 도구로서만 사용할지는 아직 내가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