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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한 스컹크 Dec 15. 2023

품고 있는 날개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결심하다

20살 초반에 취업으로부터 도망치고 아르바이트만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영어도 좋아했고 외국생활도 꼭 해보고 싶었기에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는 매력적으로 보였다. 미국은 총기 사고가 무서웠고 호주는 워낙 인종차별이 심하다고 들었다. 그리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친구는 농장에서 일만 하다가 한인마트에 취직해서 일만 하다가 왔다. 영어는 늘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라는 목표가 생기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몇 개월 모은 돈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하려고 하는데 밤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교통사고가 나서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놀라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병실에 누워있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엄마는 가족이라고는 연락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오빠는 군대에 가 있는 상태였고 아빠랑은 이혼 후 서로 연락을 끊었으니 나밖에 없었단다. 심지어 군대에 간 오빠는 이라크로 파병을 지원했다는 연락을 끝으로 몇 달간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병원에 가서 돌봐주고 말동무도 해주고 있었다. 한 번은 병원에 있는 동안 씻지 못해서 찝찝하다며 샤워를 하고 싶다고 했다. 간호사분께 외출을 허락받고 택시를 타고 엄마 집에 가서 링거 맞는 부분은 물이 들어가지 않게 비닐봉지로 잘 막은 후 엄마는 시원하게 샤워를 했다. 그리고 그날은 엄마가 병원에서 제일 잠을 잔 날이었다고 들었다.


엄마는 솔직히 그동안 나를 미워했었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딸이 있어야겠구나 싶다고. 오빠는 이라크파병 이후로 연락이 없다며 궁시렁거렸고 이래서 아들은 키워봤자 다 소용이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자기가 필요해지니까 내가 아쉬운가 보구나. 예전에 이혼할 때는 나랑 오빠를 짐이라고 표현했었으면서. 그리고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엄마는 젊은 시절부터 지병이 있어 약을 오래 복용했다. 그리고 유전적으로 간이 안 좋다. 오빠를 임신, 출산, 육아를 하는 동안 아빠는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고 가난해서 잘 챙겨 먹지도 못하고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1년 후에 내가 생긴 것이다. 원하지 않게.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고 나를 낳을 때는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못 낳고 조산원에서 나를 힘들게 낳았다고 했다. 나를 낳은 후에도 몸에 경련이 와서 구급차에 몇 번이고 실려갔고 그 덕분에 나는 엄마 젖을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분유를 먹이면 분유를 소화시키지 못해서 다 토하고 배앓이를 심하게 하느라 매일 울었다고 했다. 가끔 술에 취해서 아빠가 집에 들어와서 밤새 내가 울면 양쪽 볼을 사정없이 때렸었다고 했다.(내가 어느 정도 컸을 때 술 먹고 웃으면서 나에게 말해줬다. 아동학대인 줄도 모르는 부모라니.) 그러면 나는 더 크게 울었고 결국은 주인집에서 주인이 집에 와서 애 좀 달래라며 소리쳤고 그때서야 아빠는 나를 안고 달래주러 밖으로 나와서 재웠다고 했다.

내가 3~4개월쯤 되었을 때는 엄마는 오빠랑 둘이 시장에 가거나 목욕탕에 가서 집을 몇 시간씩 비웠다고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방치되며 컸다. 

내가 커가면서 얼굴이 점점 아빠를 닮아가자 엄마는 나를 더 싫어했다. 말 끝마다 '지 아빠를 닮아가지고는..'이라는 말을 나에게 붙였다. 아빠에 대한 분노가 심해질수록 나를 더 싫어했다. 그리고 분풀이는 오빠와 나에게 했는데 나는 손으로 많이 맞았고 오빠는 옷걸이나 연탄집게 등 도구로 많이 맞았다.


내가 학교에서 가지고 오는 가정통신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상장도 그랬다.

오빠가 받아오는 상장은 액자에 곱게 넣어 텔레비전 위에 놓였고 내 상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루는 예방접종을 하라는 가정통신문을 오빠와 같이 가지고 왔다. 오빠는 데리고 바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고 나는 '너네 아빠한테 말해'라며 무시당했다.

아빠는 몇일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삐삐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에 아빠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 때마다 나는 학교에서 맞았다. 예방접종을 해오라고 했는데 안 해왔다는 이유로 뺨을 맞기도 하고 하루종일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기도 했다.

3일 정도가 악몽같이 지나고 드디어 아빠가 집에 왔다. 술에 잔뜩 취해서 집에 온 아빠는 내 가정통신문 이야기를 듣더니 주사를 맞고 오라며 돈을 던졌다. 내 기억에 5천 원짜리 하나를 던져 준 것 같다. 주사는 보건소에서는 3천 원이었고 병원에서는 만원이었다.

밖에서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보건소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어물어 보건소에 도착했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주사를 맞는 아이들의 비명소리, 울음소리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반 친구들 앞에서 뺨을 맞으며 받는 창피함과 체벌이 더 무서워서 얼른 접수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말을 잘 못 하고 그냥 가정통신문과 돈을 들이밀었다. 무서웠지만 꾹 참고 용기 내서 주사를 맞고 아픈 팔을 문지르며 나왔다. 엄마 손을 잡고 가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한참을 울면서 걸었고 집 근처에 왔을 때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남은 2천 원으로 집 앞 구멍가게에 가서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집으로 갔다. 집에는 오빠만 있었다. 우리는 맛있게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나눠먹었다.


내가 고등학생, 대학생 때 장학금을 탔다고 엄마에게 자랑하면 엄마는 항상 '너네 학교에는 애들이 다 그렇게 멍청하니. 너 같은 애가 장학금을 타게.'라고 말했다. 한 번도 칭찬해 주는 법이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워킹홀리데이를 갈 것이라고 했더니 몸이 약해진 엄마는 나를 붙잡았다. 지금 자기 옆에는 아무도 없는데 너무 무섭다고. 그 말을 들으니 나도 마음이 약해졌다. 이렇게 엄마도 늙었구나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엄마가 퇴원하던 날 나는 모아놓았던 돈으로 엄마에게 한약도 사 주고 그동안 일을 못 했으니 돈이 없을 것 같다며 용돈도 주고 집에 왔다. 그렇게 열심히 모아놓았던 돈을 다 엄마에게 주고 워킹홀리데이라는 꿈도 접었다. 


내 주제에 해외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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