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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8. 2022

어울리는 자리에 고운 모습으로

어울리는 자리에 고운 모습으로  

   2007. 5.27


   며칠 전 초파일에 친구 심병섭 내외와 내 아내와 함께 경남 창원시 성주사를 참배했다.

   성주사는 병섭의 아내가 다년 간 여신도회장을 맡았던 절이라 초파일 그 바쁜 가운데서도 원정 주지 스님을 만나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사찰음식으로 점심 공양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공양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스님말씀이 “오늘 약 2만 명이 오실 것”이라 했다. 

   공양 후에는 경내에 있는 茶室을 찾았다. 아담한 기역자(달리 보면 니은자 인지도 모르지만) 한옥에 게다가

2층으로 된, 그다지 크지도 않은, 마음에 아주 쏙 드는 집이었다.  다실 입구엔 주인이 들꽃을 키우고 있어서 이쁜 꽃 나무들이 반겨주었다. 모두 특징 있거나 앙증맞은 화분에 담겨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집안에는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단아하게 생긴 마담이 한옥의 아담함에 어울리는 초여름의 절 집 옷 차림으로 마침 같이 있던 원형스님과 함께 손님을 맞이해 주었는데, 별 의미 없이 웃거나 그러지 않아서 더 정숙한 느낌이 들었다. 원형스님과 함께 우리는 두꺼운 통나무 상에 마주 앉아 설록차를 주문했다.

   집안은 햇빛을 많이 받도록 창틀이 아예 방바닥까지 내려온 통 유리창, 아니, 햇빛보다는 오히려 신선한 기운에 싸인 바깥 산과 계곡의 풍경을 마음껏 받으라는 뜻에서 크게 만든 유리창같이 느껴졌다. 한옥에는 잘 안 어울릴 것 같은 차가운 유리도 맑은 풍경을 내다보는 순간 이 집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 한 번 살아보고 싶고 가져보고 싶은 집으로 한옥을 꿈꾸고 있다. 2층이나 3층의 품위 있고 정원도 널찍한 한옥을 말이다. 소나무 목재의 해맑은 노란 색과 고른 나이테 줄, 정교하게 짠 전통 창호문, 질박한 두꺼운 통나무 찻 상. 고운 마루 바닥…어울리는 액자와 족자들…방바닥 위로 흐르는 노래들….


   원형스님은 자칭 ‘바람처럼 사는 중’이란다. 그것도 수행정진이란다. 그는 국내외 세상 어디든 다 가서 살아본 것 같고, 그의 맑은 목소리와 웃음소리는 童顔에 썩 잘 어울렸다. 설록차가 들어왔다. 스님이 직접 만들어 따라주는 차를 마시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뜨거운 물에 봉지를 뜯어 휘저어 마시는 커피와는 다르게 절차가 여럿이었지만, 물 온도 조절이 잘 되어서 차가 떫지 않고 참 맛있었다. 몇 번이고 우려내서 맛이 거의 안 나올 때까지 웃고 떠들며 얘기를 나눴다. 

   내가 살던 충남 보령, 거기 임진왜란 때 다 타버린 절 터, 거기서 애석함을 감추지 못했던 聖住寺도 이곳 성주사는 이름도 같고, 한자도 같고, 창건한 사람이 무염국사와 연결된 것으로, 깊은 연이 닿는 것을 알았다. 원형스님은 보령의 ‘왕대사’에도 가 있었다는데, 내가 보령에 전근가서 처음 다니던 절이 아닌가? 나와는 간접적으로 인연이 또 닿았다. 

   왕대사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께서 다닌 절이라 王자가 붙었다. 게다가  경순왕의 일곱 번째 아들의 아들이 우리 삼척김씨 시조이시니…. 

“이 집은 비가 내리는 날이 더 운치가 있다”는 병섭의 말이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에 내 생각은 어느새 비스듬히 누워서 장죽을 빠는 옛 선비가 되어 저 유리창 밖 풍경 속으로 내달렸다.


  <낙숫물>

  기와집 추녀에서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빗물 떨어진 자리엔 속절없이 구멍이 생기네

  초여름 날  낙수에 튀는 흙 다 보이는 통유리창가에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선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텔리비전도 없고, 전축도 없는 방에서

  책만 읽었을까?

  아니면 어느 황진이를 생각했을까?


   방안에 들어설 때부터 눈에 띄는 몇 분(盆)의 생화 꽃꽂이가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딱 있어야 할 자리에 자리잡고 있어, 이 고즈넉한 찻집에 누가 그리 많이 와서 봐 줄 거라고 저렇게 예쁜 모습인지 “좀 많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웬걸, 차를 갖다 준 마담이 잠시도 쉬지 않고 꽃 매무새를 고치는 게 아닌가! 

시든 꽃 잎은 따주고, 새 잎으로 갈아주고, 엄마 등에 업혀 잠들어 틀어진 아기 목 바로 고치듯 이리 세우고 조리 다듬고 계속 마음을 쏟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고울 수가 없지. 한 번 손길이 가면 꽃들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주인의 마음을 나타냈다. 세로로 바지를 입고 서있는 남성 같은 표현도 있고, 가로로 누워 남자의 사랑을 기다리는 농염한 여인 같은 표현도 있고, 

   그래! 저 기막힌 음양의 조화를 시샘이라도 해보자! 

   막 그 여인의 허튼 유혹을 카메라로 칵 찍어버리려는 찰나, 내 카메라를 탁 막아서는 마담. 

   손 좀 더 본 다음에 찍으라고 또 다시 매만진다. 마담은 과연 너무 끼가 진한 여인의 욕기를 절제시킨 걸까? 아님 더 강렬하게 유혹하는 모습으로 만든 걸까? 마담의 등 뒤쪽에 있는 나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일 뿐이다.

   수반은 자리를 잡는 것도 그 위치의 정도를 조절하고, 해바라기를 비롯한 꽃들은 한결같이 웃고는 있어도 하나의 방향을 향하지는 않았다. 전축과 전축판 꽂이, 벽의 공간을 잘 가늠하여 마침 전시되고 있는 사진들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해바라기>


임향한 내 마음 어디에 둘까?

부끄러워 부끄러워

똑바로 볼 수 없네.


임그린 내 마음 어디에 둘까?

부족하여 부족하여

한 가운데 자리할 수 없네


   갑자기, ‘사람의 마음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큰 수반을 장식한 꽃도 있고, 아주 작은 꽃도 있고, 세로로 가로로, 넘친 듯 모자란 듯, 화려함과 소박함, 기개와 겸손, 큰 것과 작은 것, 꿈과 현실….


   꽃이 향기(香氣)와 색(色)을 뿜는 생물(生物)일 때, 목재나 쇠, 도자기는 무생물(無生物). 그러나 옛날에는 이들도 생명을 가졌던 물체였다. 목재는 살아 있던 나무에서, 도자기나 쇠(鐵)는 숨쉬던 흙에서 태어난 것이다. 생명이었다가 무생물이 되면 영원불멸의 경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여기서 이제 생과 사의 딱 중간에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도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생生과 사死의 끈>


화로에 담긴 저 불 꽃을 보라!

수반에 꽂혀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던 

저 붉은 장미화

이제는 돌아갈 자리에 누워

훈훈한 숯불인 양

마지막 열기를 은은하게 자아내고 

사그라든 불은 흰색의 재가 되있어.


화롯불에 불 쬐던 시절이 기억

산등성이 타고 도토리 줍던 추억…


이제 마지막 이승의 모양은 

저 화로 테처럼 둥글게 둥글게 갖자

그 둥근 최후의 언저리에 작은 자리 잡고 

생명을 노래하는 저 풀 좀 보소!

生과 死를 연결하는 절묘한 끈을 보소!


사라지는 장미는 

화려하지도 않은 풀이 살아있음을 

부러워하지도 질투하지도 않으면서

둥근 마음을 가지고 생의 끈을 놓을 수 있다네.


   내부 장식이라고 표현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이 다실에는 간단하면서 담백한 맛이 나는 집기 몇 가지로 방안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화려하지 않은 옛 주전자, 색깔을 진하게 풍기지 않는 도자기

접시, 연(蓮)못이 있는 16각 찻 상 …. 

   저 상 위에 찻잔을 놓으면 연못에 잔 띄운 격일세!

   친구는 오래된 LP 레코드 판 중에서 오래된 노래 한 곡을 골라 틀었다. 조용히 낮게 울리는 저음을 즐기며 우리는 한옥 다실을 전세낸 듯 즐겼다. 

   한쪽에 자리한 또 다른 전축도 스피커도 모두 잘 조화된 장식이었다.


<찻 집의 노래>

 

큰 스피커 두 개는 눈

전축은 코

차 상은 입

눈에서 나오는 음악

우리 마음을 가라앉히네. 


   나무, 주물, 질그릇은 투박하지만 맨돌맨돌 손 기름이 묻은 질감이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야멸차지 못하기

에 대하기 참 편하다.

   마침 창원의 사진작가 라상호 선생의 작품전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캄보디아의 불교유적을 촬영하여, 수백 년 공든 탑도 보여주고, 그 나라 승려들의 모습, 국민들의 생활상도 잘 보여주었다. 

우리가 차를 마시는 동안 선생이 마침 들어와서 인사를 나눴다. 꽁지머리를 한 예술가의 냄새가 푹푹 나는 차림이었다. 전문가의 길을 걷는 다는 것? 자기 자리를 만든다는 것? 다실을 지은 건축가도 다실을 다듬는 마담도 모두 전문가다.

   求道의 길을 걷는 스님도, 茶道도, 사진작가도, 사업을 하는 친구도, 살림을 하는 아내도, 산업을 하는 나도, 감상하는 사람도 묵묵히 제 일을 제대로 할 때, 그래서 경지에 이를 때에 전문가가 되겠지. 

 

   아내도 얼마 전부터 나와 같이 한옥에 대한 욕심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었는데, 마침 이 집에 와서 보고 더 한옥을 좋아하게 되는 것 같았다. 둘이 마음이 맞아야 언젠가 저런 집하나 짓고 살지. 2007년 초파일은 친구 덕에 묵묵히 정진하는 전문가를 생각케 하는 날이 되어 더욱 의미가 깊다.


<어울리는 자리에 고운 모습으로>


자기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누가 얼마나 봐주든 상관없이

어울리는 자리에 있어야할 것을

고운 모습으로 자리잡게 하는 솜씨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하고

그 자리를 제대로 지키도록

요리 다듬고 조리 매만지는 전문가


 *2022년 

2~3년 전부터 삼척김씨 시조는 경순왕의 일곱 번째 아들이 낳은 손자에서 아들로 한 대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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