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릉도원 김수형 Dec 19. 2022

김남주 할머니의 사계

김남주 할머니의 사계

   2015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조부모님 슬하에서 컸던 내게는 김남주(金南周) 할머니가 어머니 대신 어머니였다. 할머니는 훌륭한 ‘1인 상인’이셨다. 당시 시골사람들이 농사에만 매달려 있던 시절에 농사 틈틈이 장사도 하셨으니까. 물론 우리 집 농토가 적고 소도 안 키웠으니까 그랬겠지만.  

손주로서 좋게 말하면 할머니는 생각이 그만큼 깨였던 것이고, 그래서 더 좋게 말하면 상업을 했기 때문에, 치마 안쪽에 차고 다니던 낡고 닳은 돈주머니에는 언제나 현금이 들어 있어, 웬만한 돈 문제는 해결되었다. 뭐 시골에서 그리 크게 쓸 돈도 없었지만, 아무튼 그 어려운 1940년대에 푼돈이 아쉽지 않았다는 건 시골에서는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중학교 졸업식을 며칠 남기지 않은 어느 날 저녁에 난 이대로 졸업하기에는 너무 서운한 것이 있다 생각하여, 궁리 끝에 할머니에게 돈을 얼마 달라고 했다. 그게 내 기억에 있는, 내 생전 내 입으로 돈 달라는 말을 처음 한 일인 것 같다. 할머니는 바로 돈을 주셨고, 나는 바로 시내 학용품 가게로 가서 백지와 색연필을 사다가 바로, 당시에 졸업생들에게 유행하던 '졸업 싸인지'를 만들었고, 이튿날 친구들, 후배들에게 나눠주고 글을 받아 오랫동안 고이 간직하면서 중학교의 추억으로 삼았다. 이것도 할머니에게 푼돈이 없었다면 될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에는 지금도 5일장이 서는데, 할머니가 '교가 장'에서 취급하는 상품은 계절에 따라 다양하여 종류가 많았다. 질금(콩나물)은 대표적인 상품이다. 여름 내 풀 매고 키운 콩을 가을에 수확하여 그 중 알이 좋은 놈을 일일이 골라서 질금용으로 보관한다. 질금은 항상 방안에서 길러야 하니, 어릴 때 나는 질금 시루에 물주기를 자주 했다. 빛을 보면 콩나물이 녹색이 되므로 검은 보자기를 씌운 질금 시루가 눈에 선하다. 넙적한 옹기에 물을 담고, 그 위에 디딜방아 다리처럼 생긴 Y자 나무를 걸치고, 그 위에 구멍이 숭숭 난 콩나물 시루를 올린다. 

 물은 고지(박) 바가지로 떠서 자주 줄수록 좋고, 시루에서 흘러내린 물을 떠 골고루 뿌려주면 콩나물은 어느 새 콩나물 크듯 잘 큰다. 놀다가도 공부하다가도 질금에 물을 자주 주었다.

물에는 기름기가 들어가면 콩이 썩어버리므로 아주 조심해야 한다. 자주 새 물로 갈아도 안 된다. 며칠씩 주고 나면 물에서 비릿한 콩나물 냄새가 나지만, 그렇게 두었다가 한 번씩 갈아준다.


봄 월동초. 할머니는, 봄에는, 꽃이 피기 전의 월동초며, 뜯어도 뜯어도 끝도 없이 올라와 전체 길이를 알 수 없는 부추와 근대를 뜯어서 한 단 두 단 묶어 장에 나가셨다. 월동초는 유채와 흡사하게 생겼는데, 월동초 잎은 좋은 채소이니 맛있게 나물반찬으로 해 먹었고, 노란 꽃이 많이 피고 또 피고, 그래서 벌과 나비가 마구 몰려들어 시골 소년이 심심하지 않았고, 여름을 지나 열매를 맺으면, 가을에 잘 여문 씨를 받아 두었다가 이듬해 봄에 씨를 뿌려 다시 가꿨다. 종자를 직접 가꾸신 것이다. 월동초 뿌리는 꼭 팽이처럼 생겼는데, 겨울에 언 땅을 파서 그거 뽑아 깎아 먹으면 맛이 정말 좋았다. 그게 군것질 중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거였지.

 여름철 근대. 근대는 그늘에서도 그런대로 자라서 감나무 밑에서 많이 키웠는데, 비교적 해충이 안 붙는 깨끗한 채소다. 할머니 생전에 근대 국을 많이 끓여 먹었지만, 근대는 요즘 먹어도 담백하고, 삶은 잎 줄기를 씹는 기분은 아주 약한 저항감이 있어 씹는 맛이 부드럽다. 그 후에 할머니 품을 떠난 후로도 근대는 자주 먹지만, 요즘은 근대 국을 먹을 때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움에 젖게 되니 나도 나이 제법 들었네.

 가을 감. 감도 할머니 주류 상품. 여름이 한창일 때 감나무 밑에 떨어진 밤알만한 감은 주워다가 삭여 먹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맛은 별로 없었다. 가을이면 주먹만큼 큰 퍼런 물감을 따서 미지근한 물을 담은 동이에 넣어 이 역시 이불로 싸 아랫목에 놓고 삭여서 시장에 내 가든가, 조금 늦은 가을에는 주로 왕감으로 홍시를 만들어 나가셨다. 우리집 도장방에는 홍시를 만드느라 감을 가지런히 놓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따금 잘 익은 홍시를 꺼내 먹던 일은 촌에 사는 어린아이의 특권이었다. 

왕감은 감나무째 상인에게 팔든가, 우리가 직접 따야 할 때는 장대와 밧줄을 길게 늘어뜨린 광주리를 가지고 감나무에 올라가서 땄다. 감나무는 잘 부러지기 때문에 조심해서 올라가야 한다. 언젠가 어머니가 감을 따다 나무에서 떨어져 고생을 많이 하신 적이 있다. 

감이 많이 열리는 해에는 왕감으로 곶감을 만들어 주렁주렁 처마 밑에 매달아 말리고, 곶감이 다 되면 10개씩 짚으로 계란 묶듯 묶어 음지쪽에 두면 저절로 분이 피었다. 그렇게 만든 곶감은 명절 차례를 지낼 때나 제사 때 쓰는데, 몰래 꺼내 먹기도 했다. 감 껍질을 말린 곶감 껍데기는 한 겨울에 먹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우리 집에는 왕감 나무가 세 그루, 물감나무가 한 그루 있어 감을 많이 먹었다. 왕감 나무는 할아버지 감나무, 형 감나무, 내 감나무로 이름을 붙여 불렀고, 물감나무는 할머니 몫으로 불렀다. 

마치 요즘 애완견 여러 마리 키우면 모두 다 이름을 붙이듯, 어느 감나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감나무 얘기를 많이 하면서 살아야 하는 시골에서는 이름이 필요했다. 그 중에서도 할아버지 감나무에 달리는 반물래기(반쯤 무른 홍시)는 맛이 일품이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쪼르르 달려가면, 밤에 이슬 맞은 채로 아침햇살에 약간 투명한 홍조를 띤 반물래기가 잎 사이로 얼굴을 내 보인다. 반물래기는 감 반쪽은 확실히 홍시인데 나머지 반쪽은 약간 덜 홍시지만, 떫지는 않고 완전 홍시보다 식감은 더 통통한 아주 맛있는 감이다. 아침에 그거 한 개 따다가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께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었지. 

 우리 동네 무릉에는 감나무가 무척 많았다. 어떤 것은 아름드리 굵어서 우리 집 감나무는 청년 축에도 겨우 끼었다. 건식 선배네 감나무는 한 그루에 서너 종류의 감이 달려 부럽기 그지없었다. 건식 선배 아버지가 접을 붙이는 기술이 좋으셔서 빼쪽 감, 따발감, 왕감 들을 한 나무에 접을 하신 것이다. 그건 어린 아이에게는 참 신기했고, 감은 고욤나무에다 접을 붙여야 한다는 것도 그 때 알게 되었다. 

감나무에서는 봄이면 연두색 잎이 나온다. 다른 어떤 나무의 신록보다 감 잎은 더 밝고 환한 연두색을 띠어서 멀리서도 그 색깔은 한 눈에 확 드러난다. 그게 왜 그런가 했더니, 감 잎은 다른 나무들의 잎이 나온 한 참 뒤에야 나오니 그랬던 것을!

가을이 되면 벌레 먹은 감 잎에 드는 형형색색의 색깔은 정말 오묘하기 그지없다. 벌레 파먹은 자리의 시커먼 색, 그 언저리의 열대의 정열같은 빨간 색, 노란 색, 초록 색들이 화가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러다가 모두 누르스름하게 변하여 땅에 떨어지고 만다.

 가을에 초가지붕 다시 일 때, 지붕 위에서 가지를 뻗친 '내 감나무'에서 누릿누릿 익은 왕감을 따 한 입 깨물어 먹으면, 아직은 약간 떫지만 그런대로 분(粉)이 폭신폭신 피어 먹을 만했다. 

그 맛에 몇 개 연달아 먹으면 나중에 똥이 안 나온다. 똥이 안 나오면 이윽고 배가 아프고, 배가 아프면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움켜쥐어야 하는데, 그 때 해결방법은 딱 하나다. 창피스럽지만, 엉덩이는 물론 남자의 본전까지 다 드러내고 바지를 내려 앞으로 몸을 숙이면, 할머니가 내 똥구멍을 꽉 메우고 있는 감 똥을 꼬챙이로 파내 주셔야 해결되었다. 

 워낙 척박한 땅이라 그랬는지, 우리 집 감나무들은 대개 '해걸이'라 해서 1년은 감이 열리고 이듬해에는 안 열리는 현상이 있었는데, 거름을 주지 않아서 그랬던 건가? 그런데도 주로 홍시 아닌 삭여서 먹는 물감나무는 그런 거 모른다는 듯 해마다 감을 열어 고마웠지만, 맛은 왕감 홍시에는 비할 바는 못 되고, 원체 물기가 많은 감이다. 

  겨울 팥죽. 그 엄동설한에도 할머니의 장사는 계속된다. 시루떡과 팥죽을 만드셨는데,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눈이 많이 내렸는지, 겨울에는 거의 매일 눈이 내렸다. 나는 매일 아침 눈 가래와 싸리비를 써서 우물로 나가는 좁은 길의 눈을 치웠다. 온 동네가 하얗게 눈이 내리니 눈 쓸고 지나온 자리가 금세 하얘졌다. 그래도 눈을 치워야 할머니가 우물에 가서 물동이를 이고 물 길러 가실 수 있으니까. 그 때는 물 두 동이만 집에 있어도 부자 같았으니까.

  눈이 오면 근덕 교가 장에 가는 길은 미끄럽고 질퍽거리지만, 식지 말라고 두터운 요로 감싼 팥죽 동이를 머리에 이고 할머니는 장으로 나가셨다. 언제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사뿐사뿐 걸으시는 할머니를 "땅이 꺼질까 봐 걱정이 돼서 그리 가만 걷느냐?"고 놀릴 정도로 늘 조용히 걸으시는데, 오히려 할아버지가 낙상을 하여 거동을 못 하게 되셨는데, 할머니는 그 미끄러운 길에 한 번도 넘어지지 않으셨다. 할머니에게는 역시 땅은 안 꺼졌다.

 겨울에는 시루떡도 자주 만들어 파셨다. 밑에 구멍이 여러 개 난 떡시루를 솥에 올려 놓고, 솥과 시루 사이 틈새를 보릿가루인지 밀가루인지 반죽을 개어 그걸로 뺑 돌아가면서 메우고 떡을 찐다. 시루떡을 적당한 크기로 칼로 잘라내고 나면 시루에 붙은 떡고물을 떼먹는 건 횡재였다.     그래서 "시루떡 만지면 떡 고물 떨어진다"는 말이 생긴 것 아닌가. 그래도 “떡 장사 떡 많이 못 먹는다”고, 우린 떡 조각을 별로 얻어먹지는 못했지만, 시루에 붙은 거는 열심히 떼먹었다. 


 이렇게, 할머니는 계절에 맞춰 식품을 만들기도 하고, 직접 재배도 하여 내다 파셨다. 장에 가져 가신 것은 거의 다 팔고 들어오셨는데,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참 용하다. 그 때도 아마 해질녘이면 ‘떨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의 다 팔 수 있는 뭔가 비결이 있었을 게다. 

그런데 참으로 더 용한 게 또 있다. 글자도 모르고, 셈도 못하실 것 같은 할머니가 거스름 돈 내주거나 뭐 그런 셈은 어떻게 하셨으며, 외상값 관리는 어떻게 하셨을까?

 나는 그렇게 유년과 소년기를 보냈는데 도시의 또래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성장했을까 궁금하다. 

이렇게 나는 순 촌놈이다. 근덕 촌놈이다.

작가의 이전글 애피소도(愛彼笑道)--남을 사랑합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